아 이들을 진정시키고, 짐을 챙기게하고, 차에 올라타게 하는데에만도 몇십분이 흘렀다. 차에 올라타서도 눈이 벌게지도록 울어대느라 그렇게 한시도 쉬지않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아이들의 입이 닫혀버렸다. 우리는 무반댁에서 다시 새롭게 만나야 할 아이들이 있으니 그 슬픈 감정은 조금 미루어 두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아이들에게 조언한다. 차안에서 조용히 음악이 흘러나오고, 창문밖으로 흘러가는 푸딩댕, 라오스의 풍경들이 눈동자를 떠나간다. 흙먼지가 날리고, 여전히 비닐봉지가 흩날리는 도로변의 풍경은 이곳에 도착한 첫날에 본 풍경과 똑같은 것임에도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이 풍경들을 놓칠새라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아까운 마음이 되어버렸다.
네 시간 가량을 지나 위앙짠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방콕에서 무반덱까지의 여정이 남아있다. 작은 라오스 공항을 통과해 작은 경비행기에 올라타 작고 귀여운 기내식을 받아들고 이 작은 나라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 땅. 기차가 없고 학교가 없고 병원이 없고 돈이 없는 땅. 그러나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아름다운 사람과 마음이 있는 땅. 제국주의자나 인종주의자가 될 수도 없지만, 낭만주의자는 더더욱 될 수 없는 이 땅위에서, 나는 적어도 작은 감동과 기쁨을 분명히 확인하고 왔음을.
ps. 방콕 공항 도착. 무반댁으로 이동. 이동중 맛있었던 태국식 저녁식사
들 썩거리던 이별파티가 끝나고, 감동에 흥분되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숙소로 들어서는데 훼이가 큰소리로 부른다. 무슨일인가 싶어 훼이의 숙소에 들어가니, 고양이 한마리가 새끼들을 침대위에 내려놓고 도망쳐버렸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새끼고양이들을 거두느라 어찌할바를 모르다간 잠시 생각한다. 참으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밤이구나. 하고.
모 처럼 일정이 느슨한 토요일이다. 아침식사후 마을 아이들과 into the village의 활동으로 tubeing족에 관한 토론을 시작했다. (정확히는 '튜빙을 하는 파렁'. 파렁이란 외국인을 말한다.) 토론은 튜빙족들이 옷을 벗는 행위를 이야기하며 시끌벅적해졌다. 통디가 말하길 그들이 옷을 벗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런가에대해 질문을 던졌다. 통디는 그들의 행위가 자신들의 일상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들도 강에서 목욕을 하기위해 옷을 벗곤 한다, 그러나 여흥을 즐기기위해 튜브를 타러와서 옷을 벗는 행위는 낯설다고 한다. 이전에 흰자는 이것을 문화적 차이정도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과연 문화적 차이, 혹은 취향과 삶의 문제로 놓아둘 이야기일까. 통디의 말에 강한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이 마을의 사람들은 분명히 튜빙족들을 불편해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들의 일상에 끼어들기 시작한 외국인 관광객들. 개발과 발전의 논리가 이들을 승낙하는 한편, 그들의 일상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것일까? 어쩌면 이 '파렁'들은 마을사람들의 삶을 침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구인 관광객, 돈을 쓰고 가는 존재, 혹은 기이한 삶을 사는 존재, 놀기위해 옷을 벗는 존재, 개발된 나라에서 온 1등시민, 혹은 힘을 가진 존재- 수많은 레이어를 가진 존재들이 이 단조로운 삶의 영토에 끼어들고 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에게 이 외국인 관광객들이 보다 나은 삶을 선사해 줄지도 모르는 이들이라는 막연한 기대들이 생겨나고 있다면, 이들은 또한 경이로운 존재이며 동경의 대상일 터이다.
단 순한 논리로 이끌어낸 결론 따위는 생기지 않는다. 현재의 삶은 이미 과거에 이들이 누려왔던 것의 몇백배 이상이나 복잡해져 버렸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식별해 낼 수도, 무엇이 냉소이고 그렇지 않은지, 혹은 무엇이 존중되어야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 또한 저 모호한 경계위에 남겨져 있다. 그러나 무엇인가 놓쳐서는 안될 것이 있기때문에, 무엇인가 끊임없이 반복해서 설명해 내고 기억해 내어야 할 것들이 분명히 존재함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지속시키는 것이리라.
ps. 비엔티엔 인터네셔널 스쿨에서 study trip으로 농장 방문. 영어수업 참여. 애들이 때깔부터 다르다. 그러나 시시하다.
pps. 커튼작업 마침.
이 런저런 물건들을 양손에 그득히 사들고 다시 농장으로 돌아와 쉬려는데 아저씨가 심각하게 나를 부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가니, 누군가 쏭강에 차를 대고 세차를 하고 있었던것. 격노한 아저씨는 식당의 손님들에게 이 현장을 사진으로 남겨 여기저기에 알려줄 것을 부탁하신다. 쏭강은 이 마을의 젖줄과도 같다. 오래전부터 마을사람들은 이 강에서 식량과 물을 얻고, 목욕을하고 빨래를 하며 함께 살아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이 장소를 관광객들의 튜빙장소로 넘겨주고, 강의 주변에는 튜빙족들을 맞이하는 맥주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강바닥을 포크레인으로 긁어 강의 흐름을 바뀌게 만들어, 관광객들이 더 '잘' 맥주집을 지나갈 수 있게 하고 있다. 아저씨와 농장의 가족들은 이 강에 미친 그러한 인위적인 행위들로 인해 언젠가는 자연의 복수를 받게 될것이라 믿고 있다.
1 월의 마지막 날이다. 서울에 있었다면 새해의 첫달이 사라져버리는 아쉬움에 한탄을 하고 있었으리라. 이곳에서도 새해의 첫달이 가버렸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닥 아쉬움이 느껴지진 않는다. 아침이 오고, 밤이오고, 일을 하고, 밥을 먹는다. 가끔씩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티비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컴퓨터도 없지만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도 그 변화를 느끼고, 삶은 그 변화에 실려 흐른다. 마을의 삶을 뒤흔드는 이 기묘한 흐름들은 계속해서 잔류하며 슬금슬금 이곳의 기류를 뒤바꾼다. 나는 종종 먹먹해 진다. 이 참아내기 힘든 먹먹함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걸까? 무엇하나 어느 곳에 남겨둘 수도, 어느 한 방향을 따라 흐르게 할 수도 없다. 무엇 하나 한곳을 향해 기울게 할 수도, 격렬할 수도, 또한 침묵할 수도 없다. 잠시간 빠져나올 수 있었던 서울에서의 지리멸렬한 일상은 다시 위치를 바꾸고 있다. 일상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길을 찾을 수가 없다.
p.s 다오, 용구와의 간담회.
우 리에겐 아무런 흥미거리 조차 되지 못할 소소한 것들. 네이버에 물어보거나, 책을 몇권 뒤적여보면 금새 찾아질 마을과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들을 이 아이들은 직접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것은 아이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일상을 직시하고, 자신들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 작은 진지함들이 고맙고 또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한 시간 여의 낮잠을 자고 일어나다. 수면시간외의 잠을 자본것이 이곳에 와서 처음이다. 피곤했거나, 혹은 이곳의 삶에 완전히 적응하였거나. 히옥스의 잠시간의 출국으로 저녁 식사후 긴 회의가 이루어졌다. 약간의 신경전이 펼쳐지다. 아직은 별탈없이 지내고 있지만 히옥스가 돌아간 이후가 슬금 걱정이 된다. 별일이야 있겠는가 맘을 편히 먹어보려 노력한다. 이럴땐 나의 이 대책없는 낙관주의가 조금은 힘이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일일 staff 제도를 도입.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하루씩 스테프의 역할을 해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어느정도의 책임감과 짐이 느껴지는 역할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몇몇 아이들을 보면서 착잡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좀더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고 또 논쟁하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하루 일정을 채워 나가는 것만으로도 왠지 부족한 느낌이 든다. 하루는 늘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언제나 시간이 그렇게 아쉬움을 주고 사라져 버리므로.
p.s 설날기념으로 약간의 떡국과 그 유명한 라오 맥주 (Beer Lao)를 맛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