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02

푸딘댕9

20060204/푸딘댕

모 처럼 일정이 느슨한 토요일이다. 아침식사후 마을 아이들과 into the village의 활동으로 tubeing족에 관한 토론을 시작했다. (정확히는 '튜빙을 하는 파렁'. 파렁이란 외국인을 말한다.) 토론은 튜빙족들이 옷을 벗는 행위를 이야기하며 시끌벅적해졌다. 통디가 말하길 그들이 옷을 벗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런가에대해 질문을 던졌다. 통디는 그들의 행위가 자신들의 일상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들도 강에서 목욕을 하기위해 옷을 벗곤 한다, 그러나 여흥을 즐기기위해 튜브를 타러와서 옷을 벗는 행위는 낯설다고 한다. 이전에 흰자는 이것을 문화적 차이정도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과연 문화적 차이, 혹은 취향과 삶의 문제로 놓아둘 이야기일까. 통디의 말에 강한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이 마을의 사람들은 분명히 튜빙족들을 불편해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들의 일상에 끼어들기 시작한 외국인 관광객들. 개발과 발전의 논리가 이들을 승낙하는 한편, 그들의 일상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것일까? 어쩌면 이 '파렁'들은 마을사람들의 삶을 침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구인 관광객, 돈을 쓰고 가는 존재, 혹은 기이한 삶을 사는 존재, 놀기위해 옷을 벗는 존재, 개발된 나라에서 온 1등시민, 혹은 힘을 가진 존재- 수많은 레이어를 가진 존재들이 이 단조로운 삶의 영토에 끼어들고 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에게 이 외국인 관광객들이 보다 나은 삶을 선사해 줄지도 모르는 이들이라는 막연한 기대들이 생겨나고 있다면, 이들은 또한 경이로운 존재이며 동경의 대상일 터이다.




단 순한 논리로 이끌어낸 결론 따위는 생기지 않는다. 현재의 삶은 이미 과거에 이들이 누려왔던 것의 몇백배 이상이나 복잡해져 버렸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식별해 낼 수도, 무엇이 냉소이고 그렇지 않은지, 혹은 무엇이 존중되어야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 또한 저 모호한 경계위에 남겨져 있다. 그러나 무엇인가 놓쳐서는 안될 것이 있기때문에, 무엇인가 끊임없이 반복해서 설명해 내고 기억해 내어야 할 것들이 분명히 존재함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지속시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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