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02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투잡족을 변명하며@Beyond Art Festival Anthology Magazine 제 1호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투잡족을 변명하며.

@Beyond Art Festival Anthology Magazine




나의 십대는 언제나 지루하고 피곤했다. 가혹하기 짝이 없는 엄마의 기상 명령과 함께 시작되는 하루는 매일매일이 똑같았다. 자고 일어나 학교에 가고, 학교에 가면 다시 잠을 잤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미술학원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미술학원에서 돌아오면 독서실에 가서 잠을 잤다. 그리고 독서실에서 돌아오면 방에 앉아서 벽지의 무늬나 얼룩 같은 것을 쳐다보며 멍하니 앉아있곤 했다. 하루 세끼를 빠짐없이 먹었고, 하루에 한번씩 꼭 똥을 눴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땐 몇번이고 똥이 마려웠다. 생각하기 싫으면 잠을 잤고, 생각하고 싶을 땐 책을 보거나 비디오를 빌려다 봤다. 연예인을 따라다니며 수선 떠는 건 유치해 보였고, 찌질한 남자애들을 사귀는 건 영 땡기지가 않았다. 가출을 하는 건 무서웠고, 손목을 긋는 건 아플 것 같았다. 겁이 많고 말 수가 적은 소심하고 평범한 아이였던 나는 이 지겨운 나날을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가수면 상태의 삶이 수년간 지속되는 와중에도 그나마 책상 밑에 만화책을 사 모으거나, 미술학원이나 독서실에 가는 척 하고는 성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앞에 줄을 서거나, 좀 ‘노는’ 애들과 어울려 지하카페의 어둑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 매캐한 말보로의 연기 속에 끼어들어가는 정도의 소심한 ‘딴짓거리’를 하며 가늘게 숨통을 틔웠다. 생각해보면 그리 짜릿한 일도 아니었는데, 문장의 5형식이나 근의 공식을 외우는 일, 혹은 아그리파의 얼굴을 쏘아보거나 광나게 아름다운 사과를 그려대는 일 보다는 조금 나았던 것일까. 예고 실기 시험을 앞둔 바로 전날엔, 어쩐지 마음이 삐딱해져서는 저녁밥상머리에서 언니의 얼굴을 향해 젓가락을 냅다 집어 던지고는 아버지에게 ‘반 죽도록’ 맞았다. 아마도 이 일이 내 지루한 십대를 관통하는 가장 지루하지 않은 사건이라면 사건이었을까. 어쨌거나 대체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나의 십대는 어느 날 그저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의 삶이 지루하건, 누군가의 삶이 고통스럽건, 또한 누군가의 삶이 즐거워 미칠 지경이건, 세월은 곤조있게 흐르고, 나의 십대는 사라진 지 오래고, 예고시험은 보기 좋게 떨어졌지만 무사히 미술대학을 나왔고, 대학원까지 나왔고, 그렇게 20대가 사라지고, 심지어 유학까지 다녀오고, 삼십대인 지금 십대인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중이다. 어쩌다 일이 이지경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십대들과 함께 보내는 내 삼십대는 지루함을 느끼기는커녕, 똥이 마려울 새도 없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하자센터>라는 이름으로 불리우지만, 공식적인 명칭은 <서울시립 청소년 직업체험 센터 (http://www.haja.net)>이다. 제도학교에 적응을 못하거나 쫓겨난 불량 청소년들이 다니는 대안학교이거나, ‘튀는’ 아티스트들을 길러내는 귀족 예술학교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하자센터>의 공식명칭을 이야기 해 주면 무척 놀라곤 한다. 무언가 비범한 아이들의 집합소에서 창의력이 펑펑 치솟는 일을 하면서 제법 명예롭고 흐뭇한 꼰대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이지 오해다.


하자센터에는 정말로 다양한 아이들이 한 해에도 수 천명씩 드나든다. 하자센터를 구성하는 몇몇 파트 중 가장 큰 부분의 하나인 ‘하자작업장학교’에는 매해 5-60명의 아이들이 이곳을 자신의 학습공간으로 삼고 상주한다. 또 다른 작은 학교인 ‘글로벌 학교’에는 약 10여명, ‘일과 요리팀’에 약 10여명, 공연팀인 ‘노리단’에 30여명 가량의 십대들이 상주하며, 강좌형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아이들이 약 500여명, ‘일일직업체험’에 참가하는 아이들이 약 천여명, 그 밖에도 수시로 생겨나는 크고 작은 기획형 프로젝트들에 참가하는 아이들 수백명이 들낙거린다. 센터 내에서 상주하는 아이들은 대개는 어떤 이유로건 탈 학교를 경험했거나 아예 제도권 교육 자체를 경험하지 않은 아이들이다. 단발적으로 하자센터를 찾는 아이들은 여전히 제도 학교를 다니고 있거나, 홈 스쿨링을 하거나, 다른 대안학교를 다니기도 한다. 드나드는 아이들의 숫자와 다양함 만으로도 하자센터는 다이나믹하기 이를 데 없지만, 프로젝트들이 만들어지고 진행되는 방식과 그 스피드의 다이나믹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수많은 아이들이 빚어내는 ‘사건, 사고’들을 따지고 들자면 생각만으로도 호흡곤란이 올 지경이다.


‘예술가/작가’로서 자신을 정체화 하고자 하는 내가 미술판 보다는 청소년 기관에서 머무르는 절대적인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은, 고백하건데, 매 순간 자신의 존재감을 의심하고 우선순위를 따지느라 죽상을 때리고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작업 이외의 일에 ‘먹고 사는’ 문제 이상의 윤리적 개념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이제 지난하고 지난한 선택의 릴레이와 분열된 감정들간의 경합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주변의 사람들은 의례히 묻는다. 무슨 예술가가 출퇴근을 하며 목을 죄는 회사원생활을 하느냐, 혹은 거기서 무슨 과목을 가르치냐, 거기 애들은 엄청 예술적이냐, 모 이런 식으로. 대답하기가 늘 난감하지만 열심히 대답을 하려고는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질문들에 성의껏 대답하는 일은 또한 나 스스로를 납득시켜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직장에 매어있다는 것은 상상한 것 보다 훨씬 더 갑갑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정기적인 출퇴근이 예술가의 삶과 만날 수 없는 지점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미술활동을 삶의 한 실천으로서 선택한 것이라면 아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 또한 예술적 실천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 이 삶의 활동에는 물론 ‘경제활동’또한 포함된다. 자본이 모든 것을 규율하고 있는 이 시대에 조차 가난한 예술가라는 미덕과 예술가는 돈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신화들이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예술가들이야말로 경제활동과 같은 가장 일상적인 삶을 실천 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언제나 작업을 할 절대적인 시간의 빈곤과 부자유에 울상을 짓게 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처럼 자신의 ‘예술활동’이 시장경제의 가치로 잘 환산되지 않는 사회적/개념적 프로젝트형 작업을 진행하는 많은 작가들의 ‘경제활동’은 종종 ‘예술활동’과 한참씩 멀어져 버리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소위 임노동이라 할만한 모든 일들이 오히려 예술적 활동의 근저에 자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자센터는 다른 직장들과는 달리, 직원들의 외부활동을 존중해주고 지지해 주는 편이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슨 과목을 가르치냐라는 질문 역시 참 대답하기 괴롭다. 이러한 질문은 사실 미술대학으로 대표되는 미술계의 메이저리그에서 훈련된 미술 인력들이, 전통적 의미의 분과학문적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쉽게 물을 수 있는 질문이다. 장르와 경계를 끊임없이 해체하면서 가장 포스트 모던하고 진보적인 관점을 부단히 만들어왔던 예술가들이 오히려 더 쉽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여전히 미술인력을 생산하는 시스템이 미술대학 이외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하자센터라는 아카데미아 권위 밖의 공간을 통해 작업자로 성장하고자 하는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녹록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일 종의 부채감이나 책임감마저 작동시키게 하는 이 기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는 것은 아이들에게 작업의 스킬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과 어떤 성장의 길을 함께 모색할 수 있는지를 부단히 실험해야 하기 때문이고, 삶을 살아가기 위한 내면의 힘을 다지기 위해서이다. 말하자면, 내가 하자센터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 ‘되기 위해’ 해야 하는 것들을 아이들에게 학습시킨다기 보다는, 무엇이 되어서든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태도’와 ‘힘’을 나누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나 스스로의 삶 또한 끊임없이 성찰해 내게 된다.


거기 애들은 좀 남다르지 않냐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실은 제일 곤혹스럽다. 남다름이란 종종 비범하기 이를 데 없는 특별한 재능 같은 것을 이르기도 하지만, 가끔은 일반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언급 했을 때는, ‘정상적인 길’에서 완전히 빗겨나 삐딱선을 타버린 ‘불량한’ 애들로 이해되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사실 십대라는 존재들을, 더구나 천명이 넘는 아이들을 어떠한 말로건 보편화 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오만이거나, 혹은 폭력이다. ‘아이들’이라는 존재는 귀신, 여자, 이주민, 혹은 동물만큼이나 주변화되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다. 적당히 규율 되어 제도 내에 포섭되어야 하는 이 ‘타자들’이 제도의 권위를 위반하고 그것을 공격할 때 두려움에 떠는 것은, 실상 어른들이고 그들이 굳건히 지키고자 하는 단단한 세계의 질서이지, 아이들 자신은 아니다. 이 아이들이 일상에서의 저항과 위반을 빈번히 일삼는 만큼이나, 저항이며 위반인 어떤 ‘언어’를 가지게 된다면 얼마나 짜릿할 것인가 하는 상상이 나를 하자센터로 이끌었다. ‘남다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들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도록 이들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 나의 일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역시 ‘어른’인 나는 아이들 언어와의 소통 속에서 빈번한 오해와 오독을 경험하며 헉헉대는 중이다. 언젠가 그들의 저항언어로 나를 초대 해 줄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십대를 ‘잠’속에 실어 보낸 것은 그저 나의 불운이었지 라며 자조 섞인 한탄을 하고 있는 것 만으론 어쩐지 찜찜하다고 생각하던 때, 나는 우연찮게 십대들을 만나고 있는 삼십대를 살고 있었다. 시대는 바야흐로 완벽히 균질화된 ‘일반적’질서로 아이들을 불러들이고 있지만, 그럴수록 아이들은 지쳐 나가 떨어지기 보다는 세상을 조롱하면서 자라난다. 가장 엉뚱한 곳에 자리를 잡고, 비루한 상상력을 지껄이며, 바닥에서 꿈지럭거린다. 의도적으로 어른들의 말을 못들은 체 하며, 토굴을 파고 기어들어가거나 저열하기 짝이 없는 외계어로 웅얼거리고, 끝없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거나, 어른들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아 준다. 어른들은 혀를 차며 이 아이들을 꾸짖지만, 아이들에게 이토록 참을 수 없는 시대를 물려준 이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적어도 나의 미술활동이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면서 그에 대항하는 저항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 스스로 정의한다면, 나는 마땅히 이 아이들과 만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줄줄이 써 내려온 대답들을 다시 나에게로 돌려주면서, 나는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한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무거운 일거리들을 떠올리며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 말 것이 뻔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언제건 삶이라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적이 있었던가, 혹은 누구의 삶이 더 쉽거나 어렵다고 말 할 수 있을 텐가 라고 묻는다면 그저 입을 다물고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해나갈 뿐이다. ‘예술가의 존재감’ 따위를 반복해 물으며 죽상을 쓰는 대신, 투잡족의 지치지 않을 강인한 체력을 위해, 인삼 깍두기를 담가 먹건, 발바닥에 불이 나게 파워 워킹을 연습하건, 몸짱 아줌마의 비디오를 구입하건 간에 무엇이든 묘안을 찾아보는 것이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은 십대든 삼십대든 바보가 아니라면 다 아는 이야기일 테니 말이다.

1 comment:

  1. 잘 읽었습니다, 응원하고싶어지네요_아이들도, 당신도, 저 자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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