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01

오프/스테이지: 이소자 Off/Stage : Sohja Lee (2012)




오프/스테이지: 이소자 Off/Stage : Sohja Lee, Single channel video, 00:04:35, 2012

오프/스테이지:조영숙 Off/Stage:Young Sook Cho (2012)




오프/스테이지:조영숙 Off/Stage:Young Sook Cho, Single channel video, 00:07:01 2012

꽃놀이 In Full Blossoms (2012)



꽃놀이In Full Blossoms, Single channel video, color and sound, 00:04:50, 2012

장마 The Season of Occupation (2011)







장마 The Season of Occupation, Three channel video installation, color and sound, 00:11:26, 2011

자본의 풍경을 점거하라 / 파산의 기술(2012)



               
자본의 풍경을 점거하라
_정은영(작가)




지난해 여름, 별나게 극성스러웠던 장마를 알리듯 연일 축축한 공기의 불쾌감이 사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할 때나는 인터넷을 떠돌며 회자되던 한 편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20여분의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딥포커스의 화면, 서툰 카메라 워크와 조작법이 빚어내는 간간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이  20분의 의지에 마음이 요동쳤다. 이 영상은 부당 해고에 내몰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의 선두에 있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직접 찍은 소스를, 부산지역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공공미디어 블로그 플로그 티비(www.plogtv.net)’가 다듬어 공개 한 것이었다.[i] 당시 김 지도위원은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의 85호 크레인 조종석을 점거하고 땅 위에서 약 35미터 가량 올라선 높이의 고공에서 농성을 200여일째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 동영상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철저하게 김 지도위원의 시선과 일치한다. 카메라의 눈은 김진숙의 눈을 대신해서 거의 7개월에 달하는 시간 동안  35미터 높이의 크레인에서 그녀의 시각경험이 받아들인 정보를 압축한다. 그리고 그 위에 예의 그 유머러스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중첩된다. 나레이션은 종종 눈이 읽어내고 있는 실제의 상태를 그대로 재현하기도 하지만, 그녀가 보고 있는 풍경에서 비롯된 내재적 심상, 실제적 경험, 혹은 자의적 해석들을 담담히 구술한다. 카메라는 딥포커스의 롱테이크로 일관하는데, 흔히 딥 포커스는  카메라를 든 사람의 시각경험을 고스란히 재현해 내고자 할 때 자주 이용되는 양식이다. 의도적으로 시점을 조작하지 않고, 어떠한 하나의 중심으로 시선을 모아내지 않으며 화면 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것들을 균등하게 재현해 내고자 하는 촬영자의 의도가 담긴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찍은 85크레인에서의 생활 (출처: 플로그티비www.plogtv.net)

딱 베게하나 크기죠? 방이. 제가 생활하는 공간이 둘이는 못 눕습니다. 이 달력 하나 폭 정도 되는 공간이에요. 그러니까 전기장판이 거의 반으로 접혀있습니다.(...)여기가 난간입니다. 처음에는 (여기서) 밖이 바로 뚫여있는 구조니까 잘 걷지도 못했어요. 바람이 불면 굉장히 흔들립니다. 난간이 지지대가 있는게 아니라 많이 흔들려요.(...)이게 제가 밥을 매달아 올리는 밥보따리. 하루 세 번 저 바구니를 통해서 저의 식량이 조달되고 있습니다. 이 롤러를 통해서. 지상과 연결된 유일한 생존의 끈입니다. 이게 배수구입니다. 두 번째 설치를 한건데요. 처음에 설치를 했다가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날아가 버렸어요. 배수구까지. 그래서 새로 설치를 한 거구요...”[ii]
“...그냥 제가 보는 전경은 한정돼 있습니다. 늘 똑같아요. 계절이 바뀐다고해서 꽃이 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새가 날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늘 이렇게 녹슨 쇠를 더불어 살아야 되죠.”

나는 이 영상을 감히 근래 본 가장 훌륭한 자본의 풍경에 관한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일반적인 삶이 유지되는 높이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서, 무엇보다도 을 존재론적으로 장소화하는 점거를 실천하면서, 반년이 넘는 시간을 버틴 한 노동자의 눈은 자신의 신체가 직면한 경관Landscape’을 어떻게 지각하고 무엇으로 인식하는지가 이 영상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화면은  35미터 높이에서 보이는 조선소 주변 지역을 조망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녀가 생활하는 크레인 위 작은 공간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다시 조선소와 그 인접 지역들에 고정된다. 삶과 노동이 이루어 지는 장소에서 벌어진 일과,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구술하는 그녀의 나레이션은 간혹 웃음을 던지면서도 촘촘하고 단호하게, 차분하고 명료하게 크레인에 관한, 그리고 자신의 점거에 관한 서사를 이어간다. 영상은 꾸준히 카메라를 든 김진숙 본인의 크레인 위 생활과 그 주변의 전경을 객관적으로 잡아내는 것을 목표하는 듯 하지만 그 시도는 언제나 자신의 점거이유를 우회한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찍은 85크레인에서의 생활 (출처: 플로그티비www.plogtv.net)

저 건너편에 하얀 건물이 우리 조합원이 생활하는 생활관입니다. 6개월을 파업을 하면서 집에도 못가고 저 생활관에서 먹고자고 생활을 했는데 회사에서 조합원들한테 퇴거가처분 신청을 해서 그게 법원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저기서 먹고자던 조합원들을 나가라는 명령서가 떨어졌어요. 참 잔인하죠...”
저기 담벼락에 바퀴벌레들(용역)이 쫙 있어요. 보이시나 모르겠네. 이게 줌을 어떻게 하는 건가... 줌이....하여튼 줌했다치고. 저 담벼락에 늘 저렇게 닭장차가 와서 있습니다. 처음에는 뭐 불편하기도 하고 좀 그랬죠. 불안하기도 하고.”
지금도 기억나는 게 주익씨가 굉장히 덩치가 커요. 키도 굉장히 크고. 그런 사람이 이 계단 난간을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어요. 그게 그냥 애처롭고 안타깝고. 근데 그때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 난간을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구부린 채 왔다 갔다 했는지를 잘 몰랐죠. 제가 여기를 올라와보니까 그 사람이 이런 날은 이런 생각을 했겠구나. 저런 날은 저런 생각을 했겠구나. 그래요. 이제 와서. 결국 이 크레인 위에서 129일 만에 목을 맸습니다. 그 시신이 저기 놓여져 있던 자리가 있어요...”
저기가 맨 도크입니다. 깊이가 굉장히 깊어요. 곽재규라는 노동자가 저기 도크바닥에서 2주일 만에 다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정리해고를 막아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나서 7년을 불안한 평화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재작년에 사측이 정리해고의 칼날을 빼들었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찍은 85크레인에서의 생활 (출처: 플로그티비www.plogtv.net)

이 영상물의 많은 장면은 땅거미가 내려앉기 직전, 바다와 면한 도시의 낭만적 경관이 함축하는 정서적 차원을 불러 낼 수 있는 조건이지만, 감상자들은 아마도 그녀가 처한 상황을 알아나가면서  ‘노을을 기다리는 그의 서정적  감성을 낭만화 시킬 수 없다. 조선소 독크 저편의 아련한 풍경과 서서히 켜지기 시작하는 조명등들이 반짝거릴때, 감상자는 풍경을 향유하기 보다는 그 경관속에서 어떤 역사가 만들어졌는지를 차츰 알아가며 절박함과 참담함을 소환하는 것이다. 또한 놀랍게도, 근대적 산업현장의 표상인 거대한 기계장치로 빼곡한 조선소와, 속도와 소음을 끊임없이 감각시키는 8차선 도로, 그리고 그에 면한 신자유주의적 건축이자 주거공간인 몰형식의 고층 아파트를 한 프레임 안에서 목격하는 것은,  이 악랄한 초자본적 욕망이 향하는 혼재된 도시를 읽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에드워드 렐프는 일찌기 이러한 도시화의 경관 양상들을 무장소성Placelessness’라 이른 바 있다.[iii] 역사를 지워내는, 혹은 그로부터 멀어지는 역사 없는 장소들, 인간을 소외시키는 자본화되고 획일화된 장소없는 장소들의 무장소성이 그녀의 프레임 내부에 깊숙히 자리한다.

저녁이면 여기 나와서 이렇게 봐요. 그러면 저기 사람들의 마을에 불이 켜집니다. 아직은 어둡지 않기 때문에 불빛이 그렇게 반짝거리지 않는데 은하수 같아요. 그러면 생각하죠. , 저기서 누군가 가정에서 일하러 나간 아빠를 기다리겠구나. 그리고 일하러 나갔던 노동자들은 집에 돌아가 불을 밝히고 가족들과 둘러앉아 저녁을 먹겠구나. 우리 조합원들이 그런 일상을 빼앗긴지가 6개월이 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고 씻고 출근하고 일하고 저녁이면 퇴근하고 그런 일상들이 너무나 절박한 공간입니다. 너무너무 애절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이들이 와요. 아빠가 집에 못가니까. 그 가족들을 용역들이 막네요. 못 들어 와서 애들이 밖에서 울고불고 그걸 지켜보는 아빠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죄를 많이 짓네요. 돈 때문에. 돈 하나를 위해서 인륜을 져버리고 도덕을 져버리고 천륜을 져버리고 양심을 져버리는 이게 자본입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말에 뭐 눈이나 하나 깜짝 합디까. 164일을 이러고 있어도 조남호 회장님한테 저는 투명인간입니다. 저기 배가 또 가네요. 배타고……. 아 근데, 그런 얘기 뭐 하려 하겠습니까. 노을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오늘은 노을이 없어요. 그냥 갔어요. 해가. 인사도 없이.”

서양회화의 오랜 전통 속에서 풍경화는 자연의 낭만적 경관을 보여주는 동시에 포악한 일면을 다룸으로서 인간이 자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경외감을 불러일으켜왔다. 또한 풍경화는 자주 미지의 대지를 점령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자 탐험가들을 만족시켰고, 귀족이나 자본가들이 소유한부동산으로서 대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점차 풍경은 독자적인 장르가 되었고, 풍경에 대한 해석과 연구가 함께 진행되자, 차츰 풍경에 은닉되어 있던 정치적, 이념적, 계급적, 인종적 함의들을 추적 할 수 있게 되었다. 풍경은 단순히 미학적 표상이 되는 것을 넘어, 그것을 통해 풍경의 향수자가 세계를 해석하고 구성하고 이해하는 일종의 제도적 세계상이 되었다. [iv]  때문에 현대미술에서의 이미지가 더이상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으로 접근되고 있으며, 대중매체 역시 이미지 아래 숨은 들을 전방위적으로 이용하는 전략을 변함없이 즐겨 쓰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이미지의 너머를 읽어낸,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그에 개입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재현의 도구를 지니고 꾸준히 85호 크레인을 방문했다. 이 견고한 자본의 풍경을 지워내고 거부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내부로 깊숙히 연루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재현의 도구를 들고 사건의 현장에 개입한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딜레마를 경험하는 것이다. 일테면 카메라와 같은 도구는 언제나 시야에 잡히는 모든 것을 포획하고 재현 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김 지도위원의 카메라는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관객의 기대를 적중하지만, 타자의 풍경으로 개입해 들어가는 외부인의 카메라는 거의 이 투쟁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김진숙을 향하게 된다.

타자의 삶을 재현하고자 할 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그들의 삶을 이미지로 포획capture’하는 것이기 쉬우므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수잔 손택이 언젠가 참여하는 자는 기록하지 않고, 기록하는 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방식의 포획으로서의 재현은 종종 연대를 가장한 타자화의 전형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또한 어떤 경우에 매우 유의미한 전략이 되기도 하는데, 한 장소를 점거한 몸의 부피와 면적을 기록해 내는 것은 그 몸을 보이지 않도록/ 존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싸움을 걸어오는 거대한 힘에 저항하는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시위참여자의 수를 셀 때 시위대측과 경찰측의 추산량이 늘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더불어 이 방식은 김진숙 스스로가 자신을 보이지 않는 존재에 빗대면서도 결코 스스로를 보이는 몸으로 등장시키지 않는 이 영상을 벌충하기 위한 요구를 향한 응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더 보여드릴게 없네요. 하여튼 79일 날, 오세요. 오시면 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조남호 회장님한테는 안보이는 투명인간, 김진숙이가 여러분들의 눈에는 보이길 바랍니다...”       
               
피말리는 저항과 갈등의 연속이었던 김진숙의 크레인 점거는 309일만에 비로소 종지부를 찍었다. 엄청난 수의 개인들이 이 시간을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크레인 아래, 수 많은 밤과 낮을 연대점거 하면서, 그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SNS를 이용해 자신들이 보고 깨닫고 기억하는 것을 꾸준히 전송시켰고 그것은 거듭 RT되거나 Share되면서 보다 더 많은 독자들에게로 유통되었다. 김진숙의 한진중공업 정리회고 철회 농성과 관련해 지난해 약 96 4000여건의 트윗tweet이 발송되었다고 한 일간지는 집계했다.[v] 이후에도, 더 많은 곳에서 여전히 자본의 힘이 거침없이 사람들을 밀어냈고, 수 많은 장소들이 이와 흡사한 방식과 과정을 거쳐 밀려난 이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자본의 풍경은 순식간에 점거의 풍경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가 현현되는 장소로, 저항의 요구와 연대가 실현되는 공간으로 재위치 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움직임 또한 빠르게 전개되었다. 지난 9 17일 시작된 뉴욕의 월가점거시위 Occupy Wall Street’가 세계 각지로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점거의 요구를 가시화 했다. 얼마나 많은 몸들이 보이는존재,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드러나고 있는지에 대해 인정하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개별의 몸들은 공동의 몸이 되어갔다. ‘공동체라 이를 만한 것이 자본의 포악함이 양산한 가장 살풍경한 경관속에서 오히려 집요하게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여전히 대항 권력에 의해 지워졌다가 스스로 다시 등장하는 보이기와 지워지기를 반복하면서 꾸준히 점거의 면적을 넓혀가고 있었다.

또한 역사를 지워내는 비장소에서 이들은 다시 역사를 기입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미국의 시사주간지인 <타임Time> 2011년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Protester’를 선정한다고 밝혔다.[vi] 이는 세계적으로 매우 영향력 있는 한 시사지가 올해 튀니지와 이집트 등 아랍세계에 정치적 격변을 몰고온 반정부 시위를 위시하여 오큐파이 시위대에 이르기 까지 특정 단체나 개인이 아닌 시위자라는 개념이며 의미를 민주주의의 역사적 맥락으로 주요하게 배치하면서 저항으로서의 점거를 정식화하는 중대한 역사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대한민국의 서울, 서울시의회의 의원회관 로비는 이례적으로 성소수자들에 의해 점거당했다. 이 점거농성은 국내에서 단 한번도 보이는몸의 존재로 인정되지 않았던 성소수자 개인들의 연대체가 공적 공간을 점거하고, 그들 스스로를 존재론적으로 부각한 최초의 (문화행사나 축제가 아닌) 정치적 요구의 현장이 되었다. 이들의 점거농성은 학교내에서 학생/청소년이 성정체성과 성적지향’, ‘임신과 출산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조항을 삭제한 채 학생인권조례를 입법화하려는 움직임에 필사적으로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싸움은 성소수자 연대체의 승리로 일단락 되었지만, 이후 보수 집권당과 기독교 진영의 극렬한 방해공작으로 인해, 의결된 조례에 대한 재의요구에 부딪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같은 시기인 지난해 12월 미술저널 e-flux는 예술에서의 점거를 전방위 적으로 다루면서 저명한 비디오 미술가이자 작가인 히토 슈테옐 Hito Steyerl이 쓴  예술과 삶과 점거에 대한 상당히 통찰적이며 실천적인 칼럼을 실었다.[vii] 이 글은 점거의 의미와 예술에서의 맥락을 짚어내는 듯 보이지만 실은 자발적 삶을 위한 개인의 예술적 개입과 점거를 위한 성명이자 선동에 가깝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의 핸드폰의 비디오 기능을 켜고 무엇이든 기록하라고.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지속하라고. 우리의 손에 마음을 대신하는 이 디지털 눈을 통해 단지 부스러기처럼 남겨진 이미지들이 얽히고 탈주하고 저항하는 풍경이 될 수 있슴을 역설한다기록을 남기고 보내고 공유하고 재맥락화 해야함을, 거기에 우리가 점거할 영토가 있슴을, 언제 어디에서건 그것들이 우리를 매혹하고 있슴을 강조한다.  [viii]

히토슈테옐 식으로 말하자면 김진숙의 디지털 눈의 기록은 이미 나/우리에게  더 많은 기록을 남기도록 추동했다. 수 많은 이미지와 영상, 목소리와 유인물, 텍스트와 함성들, 매혹과 결의, 노래와 행진, 분노와 눈물, 웃음과 도전이 연대하는 다양하고 다른 개인들의 몸으로 부터 생산되어 공동의 체화된 생산물로 남겨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자본의 풍경을 적극적으로  점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상실된 장소를 돌려받기 위해서, 우리를 몰아낸 그 자리에 남겨진 견고하기 이를데 없는 자본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눈물겨운 투쟁의 장으로 밀어붙친 이 세계의 부조리한 풍경에 꾸준히 균열을 내기 위해서,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한 몸들이 재현의  공동체를 조직하고자 하는 함성이 들린다.

맞서라, 저항하라, 그리고 점거하라!”





[i]  이 영상은 다음의 주소 http://www.plogtv.net/41 에서 볼 수 있다.
[ii] 이 글에서 인용하는 김진숙의 나레이션은 모두 위 영상의 나레이션에서 온 것이다. 위의 페이지에 역시 플로그 티비가 포스팅해둔 김진숙의 나레이션 녹취 기록본이 함께 실려 있다.
[iii]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 외 옮김,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05
[iv]  김홍중 지음 ,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141-142p)
[v] 한겨레 신문 2012/1/10 (http://www.hani.co.kr/arti/SERIES/298/514067.html)
[vi] Time, 2011.12.24 / 2012. 1.2
  
[vii]  Hito Steyerl, , e-flux, #30, 2011
   (http://www.e-flux.com/journal/art-as-occupation-claims-for-an-autonomy-of-life-12/)
[viii] Hito Steyerl, 같은 글.

퀴어, 미학, 정치/ 퀴어인문잡지<삐라> 1호(2012)


퀴어, 미학, 정치
정은영(미술가)


0. 들어가며

            일부의 독자들이 다소 거부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미학은 정치적이여야 한다. 라는 고집스러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이것은 이후에 언급하는 모든 예술과 미학에 관련된 견해들이 언제나 정치성에 대한 고민들을 동반한 것이었으며, 정치는 또한 예술의 식별체제로서의 미학을 경유함으로써 그 의미와 역할이 가장 명백해 진다는 나의 편향된 입장을 미리 알리기 위해서이다.
 특히 퀴어한 미학은 무엇보다도 공적이고 정치적인 열림과 확장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믿는다. 내밀하고 사적인 토로로 뒤범벅된 자기연민에 사로잡힌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미학적 도전도 가능하게 하지 못한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소수자 정치의 오랜 슬로건은 사적인 것들이 정치적인 것으로 이양되는 과정과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파생된 저항적 실천들을 지지하는 것이지, 애정결핍과 인정욕망으로 점철된 투정 담긴 봉인된 일기장을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와 옹호하려는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나는 이 글이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Felix Gonzalez-Torres의 작업에 기반한 퀴어미학의 정치성으로 다가가길 원한다. 퀴어한 정체성이 곧 정치성을 담보하는 정체성정치를 벗어나, 정치화되는 정체성의 수행에 주목하기를 원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들의 미학적 태도, 그리고 퀴어공동체에 대한 인지와 개입에 대한 애호를 드러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몇몇 미학적 이론에 빚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내 개인의 사유만으로는 나의 편향성을 논증하기에 지적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레이슨 페리, 혹은 클레어Claire
Text Box:
   Its about time a transvestite potter     won the Turner Prize.
(이제 ‘복장도착자’ 도공이 터너상을 탈 때가 되었군요.)
 _ 2003년 터너프라이즈에서 그레이슨 페리, 혹은 클레어의 수상소감중.[1]

스스로 “‘복장도착자 도공Transvestite Potter이라 정체화하는 그레이슨 페리, 혹은 클레어는 2003년 터너프라이즈 수상자가 되었다. /녀는 푸른빛이 도는 새틴 소재의 셜리템플 드레스를 입고 시상식에 참여했다. 마침내 수상자로 그/녀의 이름이 호명되자 그 옷차림 그대로 연단에 올라 수상소감을 말했다. 그 자리엔 그/녀의 아내와 아이도 함께 했다.
이것은 어쩌면 매우 퀴어한 가시화였다. 검은 수트 일색인 시상식장의 백인 남성들 사이에서의 그/녀의 옷차림은 말할 것도 없었고, 작가인 그레이슨 페리가 호명되었지만 그의 분신인 클레어가 공식석상에 올라섰다는 것이, 그런 그/녀가 아내, 아이와 동석했다는 것이 또한 그랬다. ‘미술’상인 터너프라이즈가  ‘도공’에게 상을 수여한 것이나, /녀의 아름다운 도자기 위에는 수많은 변태적인 드로잉이 가득했다는 것 또한 이상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 모든 장면이 영국의 공중파 BBC를 통해 전 영국에 중계되었다는 것 역시 기이하기만 했다. 적어도 한국이라는 지형에서 저쪽을 건너다 보기에는 말이다.
매해 가장 논쟁적인 작품들에 상을 수여함으로써 변함없이 ‘시끄러운 주목’을 선택해 온 터너 프라이즈로서는 페리를 수상자로 선정한 것이 당연했다. 물론 영국내의 유일한 순수미술로서의 현대미술에 관여하는 상으로서 ‘도공’의 손을 들어 준 것이 단지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현대미술의 장르파괴적이고 저항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시대적이며 역사적 선택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작가로서의 그레이슨 페리가 자신의 여성분신인 클레어의 모습으로 ‘공식적인’ 시상식에 참여했고, 수상소감을 통해 스스로  정체성을 호명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 역시 매우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공영방송인 BBC의 생중계는 이 한 복장도착자 도공의 기이한 실존을 영국 내 거의 모든 가정에 전달함으로써 소수자 정체성의 도전을 미디어의 파급력 안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물론 언제나처럼 그 밤이 지난 후 터너상에 대한 논쟁은 불같이 번졌다. 페리의 작품은 애초에 전시될 때부터 16세 이하의 어린이들에게는 관람이 금지되었고, /녀의 터너상 수상에 대한 대중의 반대 의견과 혐오 발언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터너상측은 늘  그랬던 것 처럼, 들썩이는 여론에 당혹해하지도 수습하려 애쓰지도 않았다. 현대미술은 원래부터 그렇게 날 세운 의견들의 각축장인양 모든 것이 저절로 논쟁되도록 사건을 던져두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논쟁의 핵심이 작품의 외설적 수위에 관한 것에서 과히 빗겨나거나, 작가의 비규범적인 정체성을 모욕하는 쪽으로는 지나치게 옮겨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논쟁이라는 단어가 어울릴만 했다.
그로부터 거의 8년이 지난 2011 10, 놀랍게도 대영박물관이라는 제국주의 침략의 표본실이자 문명의 공동묘지와 같은 장소에서 그레이슨 페리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렸다. <알려지지 않은 장인의 무덤The tomb of the unknown craftsman>[2]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그/녀의 전시는 모든 규범에 도전하는 그/녀의 삶과 태도, 그리고 작품들이,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익명의 공예가들의 작품 190여점과 섬세하게 레퍼런스로 등치되거나 상호참조되는 방식으로 배치되었다. 이 전시는 작가 스스로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2년여에 걸쳐 박물관 유품을 리서치하는 작가의 노력과 헌신으로 가능했다고 한다. /녀는 자신의 크로스드레서 도예가로서의 실존을 역사에 등재되지 않은 채 이름없이 사라져간 공예가들의 비실존에 마주하게 하고, 이름없는 자들에게 연대함으로써, 정체성의 가시화 전략을 넘어서 심연의 공동감을 불러내는 것을 택한 것이다.

2.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그리고 그의 더블Double[3]

 








When people ask me, "Who is your public?" I say honestly, without skipping a beat, Ross.’”
(사람들이 내게 “누가 당신의 대중/관객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진심으로, 단숨에, 대답할 것이다. 로스라고. )
              _ 로버트 스토어Robert Storr의 인터뷰, 아트 프레스Art Press, 1995 1[4]
                         
            잘 알려져 있듯이,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의 원천은 언제나 그의 동성 연인 로스였고, 그의 가장 중요한 관객도 늘 그였다.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한 연인의 상실한 육체를 그의 몸무게 만큼의 사탕으로 되돌려 놓은 작품 <무제(로스), 1991>, 신체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는, 대형 광고판 위의 두개의 베게, <무제, 1991>는 대표적으로 곤잘레스-토레스 작품이 어떻게 생성, 유지, 확산되는지를 알려준다. 그의 작업은 대게 한 오브제의 더블 혹은 멀티플multiple로 배치되고 변형/훼손되며, 때론 공유된다. 이민자이자 퀴어, 그리고 HIV 감염인이었던 작가는 타자의 반복되는 은유로서,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의 은유로서 더블의 개념을 즐겨썼다.
            곤잘레스-토레스의 모든 작업은 그 자신의 삶의 기록이라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의 사적 역사를 고스란히 투영한다. 그는 쿠바출신이라는 이국성을 지닌 채 뉴욕에서 살아내야하는 이민자였고, 남성 동성애자이며,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한 분신과 같았던 연인을 그리워했고, 그 자신 역시 감염자로서 곧 삶이 소멸되리라는 것을 알고서도 더 치열하게 작업에 몰두했다. 사랑하는 연인의 상실은 분명한 사적 역사이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애도를 잡아둔 멜랑콜리한 사물들은 수많은 타인들을 그 앞에 불러모았다. 그가 지닌 취약성과 주변성은, 슬픔과 애도의 정치로, 삶을 향한 헌신으로, 소멸하는 타인과 세계를 향한 용기로 변모하는, 예술적이며 정치적인 실천이 되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동성애와 HIV에 대한 지독한 혐오가 여전히 팽배한 한국에서 아시아 최초로 곤잘레스-토레스의 대규모 전시가 수입되어 진행중이다.[5] 동성애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악마취급을 받았을 뿐 아니라 대규모의 집단 불매 운동의 표적이 되었던 레이디 가가의 내한 공연을 떠올리면 어쩐지 이 남성 게이이자 에이즈 합병증으로 요절한, 나아가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출신 미술가의 전시를 향한 관심은 너무나 미미하고 고요해서 이상할 지경이다. 감히 삼성이 소유한 미술관에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거나, 미술전시의 대중적 파급력이 이토록 소소할 뿐이거나, 혹은 곤잘레스-토레스가 선택한 정서적 은유의 외연을 띤 위협적이지 않은 재현의 양식 때문일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어쨌거나 놀랍게도 한국이라는 분열증의 사회에서 그의 전시는 보이콧은 커녕, 아주 약간의 논쟁적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의 정체성은 탈없이 자연스럽게 수용되었고 유행과도 같이 소비되었다. 공유되고 헌신함으로써 상호 관계하는 특수한 형식과 맥락을 섬세하게 살려낸 전시는, 그간의 곤잘레스-토레스 전시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좋은 큐레이션curation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연일 많은 관람객으로 북적거린다. 더구나 그의 전시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퀴어커뮤니티 내부가 들썩였고, 전례 없이 공개되지 않은 전시에 대한 에세이[6]가 쓰여지고 유통되기도 했다. 미술계 역시 그를 기다리는 듯 했다. 많은 예술가와 큐레이터들의 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언어들이 이곳 저곳에서 넘치고 있다. 곤잘레스-토레스의 더블은 연인 로스, 혹은 을 이루는 그의 오브제들 바깥에서도 수많은 타인들로, 애정의 물건들로관계의 실천들로 증식되고 유통되고 있다.
                       

3. 상실이라는 공통감, 슬픔과 애도의 정치

“슬픔은 사유화 한다고, 슬픔은 우리를 고독한 상황으로 회귀시킨다고, 그런 의미에서 슬픔은 탈정치화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슬픔이 복잡한 수준의 정치 공동체의 느낌을 제공하고, 슬픔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이론화 하는데 중요한 관계적 끈을 강조함으로써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주디스 버틀러(2008)[7]

            그레이슨 페리가 제국주의의 무덤에서 불러낸 이름없는 공예가들과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수많은 더블들은 어떤 면에선 흡사한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소멸되고 상실된 것들, 슬픔을 불러내고 때론 고통 속에 남겨지지만 직면하려 하지 않는 것들, 얼굴 없고 목소리 없는 것들, 극복하고 처단해야 할 것들이다. 그것들이 예술이라는 언어로, 미학과 정치라는 식별의 체계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슬픔 위에서 이상한queer것들이 싹트고, 그 이상한 미학은 정치성을 길러낸다. 상실의 고통이라는 공통의 경험이 우리를 비로소 타자와 맺고 있는 관계의 서사로 안내한다.[8] 이로 인해 우리는 의 존재를 라는 타인에게로 이양시킬 수 있다. 버틀러는, 에이즈로 인해서, 9.11사태로 인해서 상실한 모든 것들에 대한 슬픔을 털고 분연히 일어나 대신 그 원인을 처단하기를 종용하는 국가권력의 통치전략을 비판하면서 애도의 정치를 제안한다.[9] 인간의 취약성과 불확실한 삶을 인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정치적 공동체가 가능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적 재현에서의 소수자성은 거의 정체성의 인정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적 혐오를 폭로해 동정에 호소하거나 자아를 축복하는 치유, 혹은 과잉의 자존감과 자의식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등장하곤 했다. 들리지 않는, 번역되지 않는 소수자의 언어로 스스로를 눈물겹게 설명하거나, 억압을 규정해 폭로하고 고발하며, 정체성의 외화된 형식을 부단히 반복 재현하는 예술들이 그러하다. 이렇듯, 타인으로부터 상처받고, 사회로부터 거부되는 경험은 깊은 우울감으로 주저앉게 하거나, 반대로 소수성을 소재화하고 특권화함으로써 일어서게 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상실과 거부의 경험이, 이 비통함의 경험이 오히려 밖을 향해 열릴 수 있다고 파커J.파머는 주장한다. [10] 그는 비통한자들The brokenhearted이 마음이 부서져 흩어지는 broken apart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린 broken open 이들이 되어 정치의 주축을 이룰 때 보다 정의롭고 용감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11]
버틀러와 파머에서의 경우 모두 정치통치의 차원이 아니라, 어떠한 공동의 차원에서 거의 동일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충분히 낡은, 근대 예술의 자율성과 독자성,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지하는 칸트의 미학은 미적판단이 매우 보편적인 것이며 취향의 문제가 아닌 소통가능성에 있다고 보았다. 칸트는 보편적인 취미 판단을 설명하기 위해 공통감sensus communis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12] 한나 아렌트는 오히려 칸트의 공통감공동()으로 독해하여 취미판단의 원리가 아닌 정치철학의 원리로 이 공통감을 위치시킨다.[13] 형식주의 비판 위에 살아남은 몇몇의 미학들은 특수성을 지나치게 특권화 시킴으로써 보편성과 평등의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공통감을 통한 칸트의 형식주의 미학의 사회정치적 해석의 가능성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랑시에르 역시 칸트의 취미판단의 보편성, 그리고 공통감을 경유하지만 보편으로의 합의가 아닌 보편/특수에서 빚어지는 긴장과 불화를 정치미학에 요구한다. 그는 예술과 정치가 서로 대립하고 분리된 상태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에게 정치란 불일치하는 인간 행동 형태이며 인간 집단의 결집과 명령을 작동시키는 규칙들에 대한 예외이다. [14] 또한 미학이 어떻게 예술의 식별체제로서 그 안에 하나의 정치나 메타정치를 담고 있는지를 보여주려[15] 노력했다. 현대의 예술은 불화와 모순의 장소에서 생산된다. 그리고 어떤 예술가들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4.  퀴어, 미학, 정치

“그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파괴했듯이” 그는 언제나 존재하기 위해 그만의 “사라짐”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고정되고, 얼어붙은 오브제가 아닌 언제나 생성하는 존재로 계속해서 존재하게 할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는 같은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역사 속으로 편입시켰다. 그는 “나는 존재했다” 혹은 “나는 여기 있었다”라고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조각상이 되지 않고 그 자체로 과정의 형태로서 세계 속으로 스며들고 무한하고 영원히 다른 존재의 부분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 했다.
-권미원(2012)[16]

            현대의 미술은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그 급진성과 정치성이 날마다 빠르게 갱신된다. 소수자 미술 역시 예외적이지는 않아서, 본질론이나 정체성정치를 경유하는 재현은 흥미의 차원에 있어서도, 의미의 차원에 있어서도 낡고 지루한 것으로 치부된다. 이것은 현대미술의 언어가 지나치게 새롭고 힙hip한 것을 갈망해서라기 보다는, 미술언어 자체가 가진 의미의 지층을 수용하고 갱신하며 변태transformation하려는 자기 본연의 성질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또한 미술/예술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그것이 늘 세계와 시대를 투영함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향유하려고 할 때 조차도 우리의 삶에 직면하고 성찰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학의 최전선에서 언제나 정치를 언급하게 되고, 정치의 한복판에서 미학을 논하게 된다.
간혹 예술의 공공성이나 정치성을 정치적예술 이나 비판적예술의 동의어인 것처럼 혼용하는 경우를 본다. 이것은 그 예술을 구성하는 어떤 소재가 모든 것을 봉합하는 일종의 소재주의적인 발상에서 기인한다. 정치적이고 비판적인 예술은 그 예술이 직면하고 있는 어떤 미학적 태도나 성질과 무관하게 정치적이고 비판적인 내용을 담아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퀴어미술 (혹은 소수자미술)을 판단하고 정의하는 방식도 대부분 이와 유사하다. 소위 일반적인 미학적 독해와 미술사적 경향의 질서에 위치되지 않는 예술을 구별짓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채택되는 소재주의적 태도는, 그것이 존재하는 것 자체로 정치적이라는 오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일련의 성찰이 필요하다.  
퀴어, 미학, 정치는 마치 하나의 시스템을 공유하는 각각의 서로 다른 외연과도 같다.  퀴어미학은  퀴어함queerness이나 퀴어코드queer code를 전유해 양식화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나와 타인의 삶, 세계의 사건들을 퀴어하게 미학화하고 정치하게 퀴어화 할 것인가를 문제삼는 태도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미적양식들에 대한 도전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가능성은 제도비판으로 시작될 수도 있고, 폭로의 정치로, 정체성 정치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어쩌면 예술가 자신의 과잉자아화된 방향 모를 욕망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나의 고민은 그 시작 이후에 무엇이 담론이 되고 무엇이 정치가 되었는지에 있다. 퀴어, 미학, 그리고 정치는 언제나 모두에게 달가운 단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불화와 긴장속에서라도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













[1] BBC News, 2003/11/7 http://news.bbc.co.uk/2/hi/entertainment/3298707.stm
[2] 대영박물관 웹페이지 http://www.britishmuseum.org/whats_on/exhibitions/grayson_perry.aspx
[3] 삼성미술관 플라토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개인전에 붙인 전시 타이틀
[4] Qcc 웹페이지 http://www.queerculturalcenter.org/Pages/FelixGT/FelixInterv.html
[5] Felix Gonzalez-Toress, , 삼성미술관 플라토,  2012/0/21-2012/9/28
[6] ,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회고전에 앞선 단상: 불가능한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한 영원한 시도들>, 동성애자 인권연대 웹진 ‘랑’, 1912/6/7 ( http://lgbtpride.tistory.com/442)
[7] 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불확실한 삶>,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8
[8] 같은 책.
[9] 같은 책.
[10] 파커J.파머 지음, 김찬호 옮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글항아리, 2012
[11] 같은 책.
[12] 이마누엘 칸트 지음, 김상현 옮김 <판단력 비판>, 책세상,2005
[13] 김상현, <칸트미학의 정치철학적 함의-아렌트적 해석을 중심으로>, 대동철학회 논문집, 24, 2004
[14]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도서출판 길, 2008
[15] 자크 랑시에르 지음, 주형일 옮김, <미학안의 불편함>, 인간사랑, 2008
[16] 권미원, <에술작품의 생성: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부활의 가능성, 나눌 수 있는 기회, 일시적 휴전>, 삼성미술관 플라토 곤잘레스-토레스전의 도록,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