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05

프리즘/ 영화'아티스트', 예술가의 숙제는... /월간 아트인컬쳐 2012년 3월호

* 아트인 컬쳐에는 에디터의 수정본이 실렸다. 같이 수정본을 보며 조율했지만 아직도 영 익숙한 글로 느껴지지가 않아 여기에는 원래의 제목과 원래의 본문을 포스팅 해 둔다.



시대의 소리를 들어라
정은영 (작가)



‘은막의 시대(Age of the Silver Screen)’로 불리우던 영화의 황금기는 의외로 ‘무성’영화 시대였다. ‘소리’를 이미지와 동기화 할 수 없었던 1920년대 이전 영화기술의 한계는 스크린에 고작 고요한 움직임을 투사할 수 밖에 없었지만, 대사 텍스트를 삽입처리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보완하고,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내에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를 배치해 관객들의 감정과 정서를 최대한 이끌어내는 상영환경을 발명하는 것으로 그 한계를 극복했다. 영화 <아티스트The Artist>의 도입부는 이러한 무성영화시대의 상영환경을 촘촘하고 코믹하게 재현함과 동시에, 놀랍게도 무성영화 그 자체를 이 영화의 형식으로 전유할 것임을 밝힌다. 이러한 형식적/기술적 전략은 영화라는 매체가 ‘기술의 한계와 상관없이’ 오래간 대중의 감각과 마음을 사로잡아 왔음을 예찬하면서, 매체 그 자체로서의 영화예술의 본질과 기능, 한계를 또한 중대하게 부각한다. 이 영화가 시작할 때 관객은 1920년대의 무성영화 상영관에 앉아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무성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흥미로운 일이라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의 ‘과거형’인 ‘소리없음’은 ‘현재형’의 관객들에게 ‘동시대성’을 사고할 것을, 영화적 ‘서사’이전에 ‘형식’의 존재를 고민할 것을, 그럼으로써 오히려 스크린 밖으로 나올 것을 꾸준히 요구한다. 관객은 서서히 무음의 지루함(혹은 전통)과 그 형식 파괴의 전향성(혹은 현대성) 사이에서의 당혹감과 갈등을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이 갈등을 단번에 무력화 하고 관객을 숨죽이게 하는 것은 단연 ‘소리’의 존재다. 섬약한듯 도전적인 음향 연출이 느닷없이 삽입되자, 영화는 순식간에 기술혁명이 완성한 예술적 페러다임의 위대한 혁신에 모두를 탄성하게 한다. 영화 속 당대 최고의 스타 조지(장 뒤자르댕)만이 다가오는 유성영화의 시대를 예견하지 못하는데, 유성영화에 대한 조지의 심리적 불안감을 표현하기 위해 드디어 ‘소리’가 등장한다는 점이나, 남자 주인공의 로맨스를 완성하기 위한 상대역인 페피(베레니스 베조)가 유성영화시대의 아이콘으로 급부상 한다는 설정은 영화역사를 플롯 안에 녹여내기 위한 다분히 전형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조지가 시대정신이 결여된 채 과거에의 향수에 젖어있을 뿐인 퇴물 예술가라면, 페피는 새로운 시대의 포문을 여는 떠오르는 신예이자 개척자가 되는 셈이다. 무성영화를 도구삼아 헐리웃 ‘로맨틱 코메디’의 문법을 순순히 따르는 줄 알았던 이 영화가, 돌연 관객들에게 ‘소리’의 존재를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자 내용으로 경험하게 함과 동시에 ‘로맨스’를 하나의 은유로 작동시킬 때, 이 영화는 가장 일상적인 상업용 장르영화의 규범과 언어를 가뿐이 뛰어넘어, 영화, 혹은 예술, 또는 시대적 요구로서의 매체형식 그 ‘자체’에의 표상이 된다.

시대의 요구를 읽어내는 것은 언제나 예술가들이 직면한 가장 무겁고도 어려운 숙제였다. 나는 지난 서너해를 거의 <여성국극(50년대 한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창무극의 한 형태로, 모든 극중 배역을 오로지 여성만이 연기할 수 있다.) 프로젝트>에 매달려 왔는데, 1950년대, 한국전쟁 전후의 문화예술계를 주름잡던 여성국극의 스타들을 당대가 아닌 현재에 만나 소위 동시대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은 언제나 녹록치 않았다. 여성국극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입을 모아 그 쇠퇴 원인을 시대정신의 결여로 분석해 낼 때마다 그것에 수긍할 수 밖에 없슴을 시인하면서도 부단히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오로지 배우로서 가장 화려했던 한 시절의 향수를 거듭 소환하는 것으로만 이후의 삶이 지속 가능했던 이 노년의 배우들에게 예술의 현대성/동시대성 따위를 언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지금, 여기의 예술을 설명하고 공유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했다. 비록 그들의 예술가로서의 삶이 지워지고 거절되는 시대를 직면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마음으로 이해하면서도 시대의 요구에 맞서 협상하기를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그것은 매 순간 좌절과 열패감을 거듭 맛보게 하였으므로 영화속 조지가 마주한 거의 공포에 가까울만큼의 존재론적 위기는 여성국극 배우들의 삶을 자꾸만 상기시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지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의 부름으로 구원받고, 그야말로 ‘아티스트’가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페피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의 앞에는 페피가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아마도 페피는 분명히 나타났을 것이다. 어쩌면 한번 이상, 혹은 수없이 많이. 그러나 페피는 ‘소리’이고 더구나 ‘들리지 않는’ 소리이며, 들리고 있을 때 조차 질감되지 않는 ‘물질없는’ 소리이다. 영화 초반, 조지와의 우연한 스캔들을 대서특필한 신문은 “그녀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그 신문을 움켜쥐고 엑스트라 배우들의 오디션장에 나타난 페피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을 존재하게 하고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호명한다. “나는 페피밀러예요.” 영화는 여전히 무성 처리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를 보고 있지만 듣지 못한다. 시대의 요구는 그렇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어느날 우리의 앞에 가로 설 지도 모른다. 예술은, 혹은 예술가들은 그것을 어떻게 눈치 챌 수 있을까? 고요한 ‘무성’의 시대라면 그나마 어렵지 않은 일일 수 있다. 어차피 과거의 예술은 늘 ‘무無’를 ‘유有’로 바꾸어 내는 일이었므로. 그러나 지금, 여기, 우리의 시대, 이 재난에 가깝도록 소란한 소리들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에 응답할 것인가?

20120304

<장마The Season of Occupation> from "30분" curated by 이대범

장마




“소경 점쟁이가 예언했다는 그날이 뽀작뽀작 다가오고 있었다. 날은 여전히 궂었고, 사람들은 모두 지쳤다. 할머니 혼자만은 예외로 하고 인제는 모두가 정말 지쳐버렸다. 아주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기다리는 것에도, 계속되는 장맛비에도.”
-윤홍길, <장마 (1973)>

“ 더 이상 장마의 끝을 알리지 않기로.”
-임민욱 (2009)


비가 내리기 시작한지 벌써 십 수일 째에 접어들었습니다. 유난히 굵은 빗줄기가 그렇게 쉬지 않고 내린 탓에 세상은 온통 빗소리 안에 갖혀 있습니다. 집안에서도 거리에서도 일터에서도 사람들의 웅성거림이나 자질구레한 소음 따위는 빗소리 이상의 존재감을 줄 수 없었습니다. 오직 빗소리만이 우월하게 청각을 자극했습니다. 이번 장마는 유난히 이르게 왔고, 유난히 긴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매 년 같은 말을 되뇌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이 사실인지, 그저 기분 탓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쨋거나 장마의 끝을 기다리는 마음은 하루하루가 지날 수록 간절하기만 한데 하늘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기분마저 빗물에 젖은 듯 축축하게 처지고 아무일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거의 모든 일들을 장마 이후로 미루어두고 흡사 물속에 잠긴 것 처럼 멍청하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언제 이 물속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연신 기상 정보에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기미가 없는가 봅니다. M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지만 나는 이 장마가 지난 후에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이제는 기상청이 더이상 장마의 끝을 알리지 않기로 한 것을 모르느냐 응대하였습니다만.

비가 해도해도 너무 많이 왔습니다. 뉴스의 기상보도는 연일 파괴되고 사라진 것들에 대한 재난방송을 반복했습니다. 쉴 새 없이 갈아 엎고 파내고 밀어내고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는 땅이, 산이, 강이 어느 해 보다 더 심하게 울어재꼈습니다. 자본과 개발을 향한 굳건한 신앙은 물난리에 함께 침몰하거나 범람해야 마땅했지만 점점 더 많은 이들의 충성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만 어쩌면 예고된 일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해버리고 싶었습니다. 자연이 진노하는 것, 말하자면 강이 범람하고, 다리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실종되고, 논밭이 잠기는 따위의 이 모든 풍경은 언제나 ‘그’의 우선순위 저편으로 밀려난 희미해진 원경일 뿐일테니까요. 텔레비젼 화면을 통해 반복적으로 보아 온 재난의 풍경에 우리는 더이상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될 만큼 훈련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객관과 보편을 판단할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이니까요. 우리는 많이 배웠고, 세상의 이치를 이해했으며, 시스템 으로부터 나를 고립시키지 않는 감정조절 연습을 해왔지요. 우리의 삶은 딜레마를 극복하고 수 많은 ‘사건’들에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나날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물론 타인의 고통에 연민하고 연대하는 윤리에 대해서도 또한 고려하고 있습니다만은, 그 모든 사건들로 접근하기에는 개인들의 삶이 이미 충분히 문제적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제 코가 석자라는 속담이 모두에게 당연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또한 우리는 과민한 환경주의자나 편협한 반자본주의자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편향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는 것은 조금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해서 말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물질을 향해 살고 있으니까요.

재난은 언제나 은유나 상징이 되어 멀찍이 잊혀져 갔습니다. 간혹 모금운동과 자원활동 등의 온정주의적 움직임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그 역시 빠르게 잊혀지곤 했습니다. 나는 그저 이 장대비가 전세기한이 몇 개월 남지 않은 이 낡은 집의 위태로운 지붕을 뚫어버리지 않을까 걱정 할 뿐이었습니다. 장마는 더욱 더 맹렬해져 이제 천지 사방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물이 되었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마당에 내어놓은 화분 몇 개가 쓰러지기도 했고, 몇몇 화초들은 가지가 꺽이기도 했습니다. 방안에선 며칠째 건조대에 널려있는 빨래들이 퀴퀴한 냄새를 내뱉기 시작했습니다. 책상 위의 책들은 우글쭈글해 지고, 한번 쓴 수건의 위치에 편집증적으로 신경이 쓰이곤 했습니다. 낡고 낮은 집으론 종종 빗물이 새어들어오기도 했습니다. 빗물이 고인 바닥을 짜증스럽게 훔쳐 내면서 이런 류의 걱정들은 어쩌면 ‘그’ 때문이라기 보다는 ‘나’ 때문에 피해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럴때마다 쾌적하고 모던한 신축 아파트 단지에 입성하지 못하는 열패감 따위를 자꾸만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밤이면 빗소리는 더욱 더 거칠어 졌습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였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밤들이 며칠이고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빗발이 거세었습니다. 하필이면 마당에 엎어놓은 스텐레스 대야에 튀는 빗소리가 가끔씩 교만한 교회의 종소리를 연상시키기도 했습니다. 거센 빗소리는 의외로 으득으득으드드득 하고 격렬하게 이가는 소리를 내었습니다. 자주 성난 천둥이 치곤 했습니다. 우르르릉 꽝. 으득으득으드드득. 뎅뎅. 우르르릉 꽝. 으득으득으드드득. 뎅뎅. 가뜩이나 불면에 시달리는 나에게 밤마다 이런식의 이상한 소리의 조합이 마뜩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만은 한편으론 덕분에 당장의 삶의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기는 했습니다. 소음을 탓하느라 처리해야할 업무 따위를 까맣게 잊기도 했고 짜증을 부리느라 고된 집안일을 미뤄두기도 했으니까요. 게다가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몇몇 밤은 극도로 우아하고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물난리를 지겨워하는 짜증스런 날들로 느릿느릿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지긋지긋한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습니다. 여전히 장대비가 사정없이 내리 꽂았고,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이 빗속을 가로질러 거리를 쏘다니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은 온통 시시한 농담들을 웅얼거리고, 부석부석 습관적으로 집어 먹고 있는 과자는 눅눅해진지 이미 오래였을 때, 널어둔 빨래는 여전히 마르지 않으며, 끈끈해진 방바닥은 발을 딛을 때 마다 쩍쩍 기분나쁘게 들러붙고, 실은 잘 돌보지도 않던 화분의 안녕을 걱정하는, 습기를 머금은 책장을 넘기는 독서는 영 내키지 않는다며 투덜대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 때, 나는 문득 당신의 장마가 궁금해진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역시 지루하기 짝이 없을 장마가, 당신의 그 힘겨운 계절이, 당신의 그 고통스런 밤들과 당신의 그 절박하지만 위험하기 짝이없는 선택이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해에의 의지가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그 참담한 마음, 그러나 당신이 그토록 놓치지 않으려 길고 긴 시간을 붙들어 온 한줄기 희망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

어떻게 생각하면 비가 온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입니다. 물 속도 물 위도 물 가도 아닌, 마른 땅위의 모든 존재가 축축한 물기를 머금게 된다는 것이, 물과 땅의 경계, 땅과 하늘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들이 물방울로 뒤덮혀 그 경계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말이죠. 장마가 오래오래 시간을 끌면서, 마침내 모든 완전한 형태들로 이루어진 것이라 믿었던 세상은 그저 뿌옇게 희미해져 가기만 할 뿐 어떤 확신의 언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고 믿었던 풍경에 대해, 우리가 듣고 이해해 왔던 말들에 대해 습기 가득한 존재들은 어떤 사실도 토해낼 수 없었습니다. 반년이 넘도록 같은 자리를 지킨 당신의 눈에 똑똑히 맺혀있을 그 세상의 풍경도, 당신의 마음에 빼곡이 가로박힌 이 세계의 말들도 지루한 장마비 속에서 희미해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보다 비가 더 세차게 내리면, 모든 것을 무너뜨릴 기세로 퍼부어버리면, 마침내 세상이 모조리 물속에 잠기어 사라져 버리면, 모든 불온한 것들을 쓸어내고, 벽을 헐어내고, 우리의 욕심을 삼키고, 팽팽한 대립과 긴장으로 만들어진 이 세계의 풍경을 모조리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걸까요?

당신이 지켜야 하는 그 곳, 위태롭고도 아슬아슬한 그 비좁은 장소에서 당신은 이 물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어젯밤도 역시 요란한 빗소리를 탓하며 잠자리에서 몸을 뒤척이다가, 창문 너머로 빗줄기가 사납게 퍼붓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 보았습니다. 담벼락 끝을 치고 튀어오르는 빗방울의 반복적인 포물선 운동이 담을 허물어 내릴 것처럼 거칠어지자 나는 당신의 밤이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궁금할 뿐 아니라 연민과 우려의 마음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외롭고 위험한 그 곳에서 이 장대같은 빗발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 이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요지부동의 빗소리가 얼마나 당신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할런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와 함께 당신이 행여나 당신의 몸을 내던지지는 않을지. 나는 순간 선뜩해져서 몸을 일으켜 마른 세수질을 몇번이고 해 대었습니다. 빗줄기는 점점 더 굵고 거칠어 지고 있었습니다.

빗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때도 있었습니다. 막연한 기대를 품게하는 완전히 다른 공기가 잠깐 잠깐 밀려오곤 했습니다. 그렇게도 기다렸던 한 줌의 볕이 마룻바닥을 조용히 달구면 그 위로 발을 슬며시 밀어넣어 보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의 온도. 그 만큼의 촉감. 여기 쯤의 마음. 딱 그 정도의 이유로 나는 빗속을 뚫고 당신에게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 길 위에도 변함없이 비가 내렸습니다. 묵묵히 제 갈 길을 달리는 버스가 위태롭게 느껴지도록 많고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가는 길이었고, 그들은 어쩐지 조금 달떠 있는 듯 웅성대었지만 이내 서서히 조용해 졌습니다. 오랜 시간 빗소리가 침묵을 대신하였습니다. 누구든 이 장마의 끝을 예언해 준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를 종교로 삼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단언하건데 나는 단 한순간도 비가 오는 것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으레 사춘기의 소녀들에게 찾아오는 비오는 날의 로망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어째서인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물놀이, 바다, 수영 따위도 좋아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외적으로 물기를 가득 머금은 음습한 지하실의 시멘트 냄새에 종종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긴 했습니다만. 나는 언제나 정신병적으로 가장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하곤 했으므로 물 앞에선 거의 익사하는 것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계속되는 비를 보면서 침수의 공포 따위를 떠올리고 있는 나에게 쉴 새 없는 빗줄기는 필요 이상의 비장함을 예고하는 듯 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장마는 당신에게도 이 모든 상황을 비장하게 몰고 갔을 것입니다. 마치 공포 영화의 상투적인 비 장면 처럼, 지나친 비장함이, 어떤 팽팽한 긴장이 맹렬하게 우리를 당신에게 집중시킵니다. 나는 조금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조금만 낭만적일 수 있다면 좋았을텐데. 혹은 조금만 유머러스 할 수 있다면 좋았을텐데.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도 후회하는 것이 있나요? 당신에겐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요?

길은 막혀있었습니다.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벽은 비상식적으로 견고하였습니다. 애먼 집이나 다리를 너끈히 무너뜨리던 장마비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그 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어 보였습니다. 갈급한 몇몇의 호전적인 이들이 벽을 넘어서 보려 갖은 애를 써 보았지만 그럴 수록 벽은 점점 더 견고해져 갔습니다. 눈치없이 계속되는 비는 우리를 깊은 좌절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단호한 벽도, 참담한 이들의 분노도, 예고 없는 장마처럼 끝을 알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끝이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게 될까요? 거짓말 처럼 하늘이 개이고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식의 반전으로? 혹은 우리가 가졌던 약간의 희망과 미온한 용기가 완전히 상실되는 방식으로? 나는 느닷없이 어떠한 상실에 대해 생각합니다. 존재를 감추는 것, 존재가 사라지는 것, 존재가 잊혀지는 것,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 존재가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 모든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감각을 하나씩 기억해 내려 애쓰는 사이 단호한 벽이 과도하게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벽은 한껏 허세를 부리며 그 거대한 몸을 더욱 더 부풀렸습니다. 상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한껏 부풀은 벽이 한순간에 우리를 거칠게 밀어 붙였기 때문입니다.

늘 평상심을 저울질 해야하는 일상을 버려두고 당신을 향했지만, 이 무지한 벽은 이해할 수 없게도 우리를 점점 당신으로부터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많지 않았고 빗줄기는 여전했습니다. 기왕에 이렇게 지겹도록 내릴 것이라면 거대한 물길을 하나 만들어 주면 좋으련만, 빗발은 분노한 듯 거세었다 이내 새침하게 보슬거리며 변덕을 부리기에만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비가 내렸습니다. 그저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그저 그렇게 나는 그 자리를 지켰을 뿐입니다. 그저 그렇게 미미한 용기를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저 그렇게 당신의 의지에 다가가려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였습니다. 이 무력해 보이는 연좌는 그렇게 공간의 점유를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지겹고 지겨운 긴 장마의 어느 밤은 그렇게 지났습니다. 밤과 비와 벽, 그리고 어떤 의미의 전쟁이며, 어떤 의미의 평화. 몇 차례의 돌발적 사건과 몇 차례의 참담한 좌절, 그리고 몇 차례의 뜨거운 용기가 불연속적으로 요구되었지만 끝끝내 당신의 안부를 확인 할 길은 없었고, 우리가 공유하는 유일한 풍경인 하늘엔 별도 달도 빛나지 않았습니다. 변덕스런 빗발은 아침까지도 계속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 시간을 조금 넘기자 어쩐 일인지 빗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은 완전히 밝았고, 멀찍이로 물안개가 물러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해가 나기 시작했고, 시야가 확보되었습니다. 어느새 비는 완전히 멎어 볕이 제법 따갑게 느껴졌습니다. 대기는 차츰 건조해지고 땅은 거의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마실 물을 찾는 소리가 자주 들려왔습니다. 짧은 순간을 위한 긴 기다림과 같은 비효율적인 관용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마를 경험하는 것이 제격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유쾌해졌고, 밤새 비를 피하기 위해 쓰고 있던 우산을 이제는 따가운 해를 가리기 위해 펴 들었습니다. 잔뜩 지쳐있던 몸도 조금 더 편해지고 있었습니다. 밤새 몸을 작게 구부린 채 비를 피했던 사람들은 마른 땅 위에 허리를 펴고 눕기도 했습니다. 제 몸을 마냥 부풀리던 허세 가득한 벽도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는 조금 초라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비가 그치고, 하늘이 밝아오고, 태양이 내리쬡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활기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걸까요?

누구도 그 끝에 대해 섣불리 입을 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끝을 예고하지 않는 이 지난한 장마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끝이 옳았던 현실에 대해서라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것이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모두 지칠대로 지쳤지만 놀랍도록 결연해 보였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직사광선에 몸을 말리려 건조한 공기속을 산책하였습니다. 나는 요지부동의 거대한 벽 가까이로 다가가 그 너머의 당신에게 아침인사를 건네었습니다. 밤 새 눈은 좀 붙이셨나요? 그 곳에도 비가 멎었나요? 당신의 옷가지와 침구가 마르고 있을까요? 몇 그루의 작은 식물들은 오랫만에 광합성을 시작하였겠지요? 투명해진 공기를 뚫고 여기가, 우리가 당신에게 보이나요? 거들먹 대는 비대한 벽에 가로막혀 나의 인사는 물론 전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오랫만에 분발하던 태양은 다시 비구름의 맹공에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고작 삼십분의 평온함이 물의 시간으로 빠르게 접혀 들어갔습니다. 으드드드득, 으드드득 다시 빗줄기가 이를 갈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기다림에 도가 텃고, 당신의 투쟁은 오늘도 세상을 향하고, 장마의 끝은 어쨋거나 예보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