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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10 제니사빌_여전히 진행중인 몸

제니사빌_여전히진행중인 몸

버디에 썼던 글.
이런 부지런한 짓도 했었다.-_-


[미술] 제니 사빌: 여전히 진행중인 몸

세이랜
2004-04-10 15:00





현 대 미술계에서 제니 사빌(Jenny Saville, 1970-)의 유명세는 굳이 또래작가들과 비교한다면 참으로 놀랄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거대한 캔버스에 뚱뚱한 여성의 누드를 그린 작품들로 주목 받기 시작한 그녀는 영국 광고업계의 거부이자, 브릿아트(BritArt)군단, 혹은 와이바(yBa:Young British Artist) 로 불리우는 영국 현대미술계의 전복적인 젊은 작가 군단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찰스 사치(Chales Saatchi)의 눈에 일찌감치 각인되어 성공을 보장 받았다.

스 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 미술학교(Fine Art Glasgow School of Art)를 졸업할 당시 이미 사치의 눈에 들어, 그녀의 모든 작업은 그에게 팔렸고, 그녀의 그림에 홀딱 반한 사치가 이미 팔려나간지 오래된 그녀의 초기작 까지도 일일이 찾아내어 웃돈을 주고 매입하는 등의 열성을 보였다 하니, 제니 사빌의 작품들은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사치에게 팔려나간다는 이야기는 전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흔히 알려진 바 대로, 미술학교 졸업 이후의 가난한 무명작가로서의 방황기나, 시련기 따위는 모든 것들이 ‘자본’이 모이는 곳으로 귀결되는 이시대의 미술판에선 예술가들에게 그닥 유용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겠다.

각 설하고 그녀의 작품들을 감상해 보자. 넘들은 연봉 이삼천의 초봉이 어쩌고 저쩌고를 이야기할 때, 연봉 이삼백이나마 제발 정기적으로좀 벌어봤으면 하고 소박한 꿈을 꾸는 이땅의 가난한 무명의 젊은 예술가들에겐 ‘아티스트’와 거부 ‘패트론(Patron)’의 관계는 꿈속에서나 이루어 지면 다행인 이야기 일텐데, 쓰바, 뭐 그딴게 다 있나 싶은 생각에 괜히 부아가 치밀수도 있을 테니, 어서 눈으로 검증해야 할 일이다.


Propped 유화 1992 사치갤러리 소장



Branded 유화 1992 사치갤러리소장



Fulcrum 유화 1998-1999



Closed Contact #10 Glen Luchford와 공동 제작 C-Prints사진과 PLexi Glass 2003


그 녀의 작업은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겨버리는 거대한 캔버스의 싸이즈도 그렇거니와, 그에 걸맞게 거대한 여성의 누드, 그것도 너무나 뚱뚱해서 살들이 줄줄 흘러내릴 것만 같은 여성들의 벗은 몸은 관람자들을 당최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거친 붓 자국과, 그 붓자국으로 모습을 드러낸 여성들의 표정은 더욱 더 관람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또한 이것들은 누드임에도 전혀 에로틱하지 않다!(?) 우리가 현대미술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다 한들, 이것들이 왜 미술의 역사 내에서 누드의 전통을 뒤엎는 지점에 위치하는가를 인식하지 못한다 한들, 페미니스트들의 몸의 정치학이 어떻게 이것들을 분석하는지를 모른다 한들, 에로티시즘의 미학이 어떠한것인지 알길이 없다 한들, 어떻게 이 그림들 앞에서 밍숭 맹숭한 느낌으로 서있을 수 있을까. 잔잔한 볼륨의 모짜르트가 흐르는 평화로운 갤러리에서의 예술품 관람이라는 전형적인 재현들은 그녀의 그림 앞에서는 산산히 부서져버릴 허황된 것들이 된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우리가 좀더 기대할만한 작품으로 시선을 옮겨볼까?


Matrix 유화 1999


1999 년작 매트릭스(Matrix) 앞에서 우리는 짧게 감탄사를 내쉴지도 모른다. 역시 거대한 캔버스, 그리고 원근법적으로 비교적 관객의 가까이에서, 여성의 성기가 저항하듯 정면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우리의 시선은 그녀의 배를 타고 두 개의 늘어진 젖가슴을 지나, 멀찍이에서 이쪽을 내려보는 또 하나의 나른한 시선과 마주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대면했던 인식의 경험과 쉽게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제목은 매우 반어적이게도, 어떠한 구조, 기반을 뜻하는 ‘매트릭스’ 이다. 그래서 관객은 아마도 몇 번이나 시선을 옮기며 자신의 경험을 확인하다가는, 이내 짧은 감탄사를 내뱉을 것이다. 이것은 자명하게도 트랜스 섹슈얼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짧은 음성은 “어머나 세상에” 일수도 있고, 혹은 “아차.”일수도 있고, “멋지네”, ”재밌네”,”끝내주네” 혹은 또 다른 어떤 것 들일 수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어떠한 ‘깨달음’같은 경험이다.

육 체 페미니즘 담론들 속에서 신체란, 사회적인 재현이라는 기존의 논의를 넘어서 동일성과 차이의 대립을 해체하는 것이고, 또한 강력한 정치적 집결지가 된다. 즉,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재현물로서의 몸’이라는 논의를 흔들면서 몸은 수행적인 것(마치 드랙 처럼), 그리고 정치담론적 표현을 통한 ‘되어가기(becoming)’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퀴어 이론가 버틀러의 ‘수행적 젠더 (Performative Gender)’는 그래서 제니 사빌의 위의 작품에서 시각화 될 뿐 아니라, 버틀러가 놓고 갔던 물질로서의 몸 또한 우리에게 돌려준다. 이 몸 위에서 성별은 스스로 경계를 없애고, 성과 젠더의 정치는 무력해 진다. 우리는 이 신체의 살덩이들과 기관들을 직시하며 이 몸이 위치하는 사회적 맥락들, 그리고 또한 이 그려진 모델의 욕망을 상상하거나, 수행하고 되어감으로 무한 증식하는 n개의 성과 몸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론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빌의 작업들은 여전히 관객을 건드린다. 어서 무엇이든 생각하라고, 혹은 차라리 뒤죽박죽인 생각의 실타래들을 깨끗이 몰아내라고 말한다. 이 압도당하는 느낌은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의 신체는 누구의 것인지, 누구의 신체가 지금 재현되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그 재현되는 신체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 재현의 정치는 무엇인지 따위에 대한 대답을 만들기에 골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내 몸과 살들이 수근거리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체현(embodiment)이고, 퀴어와 페미니즘 정치의 정수일 터이다.


■ 관련 웹페이지
제니사빌 비공식 홈페이지 http://www.geocities.com/craigsjursen/index.html
Saatchi gallery 홈페이지 http://www.saatchi-gallery.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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