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서의 바깥에서 질서를 찾는 일, 혹은 제도의 밖에서 제도를 찾는 일은 언제나 녹녹하지 않다. 언어의 밖에서 언어를 찾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언어야 말로, 가장 권위 있고 단단한 질서이자 제도이기 때문이다. 균질적인 의미화를 목표로 하는 언어의 체계와 구술의 방식이,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결들과 그곳에 촘촘히 새겨진 다양한 사건들을 모두 구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언어가 그 절대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보편적 가치와 신념이 해체된 탈근대 이후의 예술가들은 이러한 언어의 권위와 한계를 넘어 ‘다른’언어를 생산하기 위한 갖은 시도를 거듭해 왔다. 조은지의 작업은 대체로 이러한 맥락에서 음악과 미술의 중간 즈음을 차지하고 새로운 장르언어를 실험하려는 노력 정도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녀의 예술적 실험은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간 자리에서 소리, 노래, 시, 행위, 이미지들을 가로지르며 각각의 언어가 가지는 고질적 장르의 관성과 한계를 아예 모르는 척 하면서 시작한다. 거기에 작가가 지닌 세계를 바라보는 긍정의 눈, 그리고 사회적 실천에의 의지와 예술가적 유머가 가진 힘들이 상호적으로 스며들거나 재배치 되면서 경쾌한 틈새의 언어를 속속 만들어 낸다.
복 날에 죽어간 개들을 위해 개농장에서 ‘백만송이 장미’를 부른다거나(개농장 콘서트, 2004), 천성산 개발에 반대하는 콘서트를 위해 밴드를 조직해 공연하고 지율스님을 모셔 강연회를 여는 등의 행위(밴드금성일식과 지율스님의 만남, 2004)는 작가가 시도한 가장 즉각적이고 실천적인 언어를 동반한 ‘행동하는 예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필리핀에서 온 이주노동자 여가수들과의 만남을 통해 만들어진 <뿜빠빠 움와 언어 (2005)>와 <여행가방 가수 프로젝트(2006)>, 그리고 작가 스스로 이방인이었던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제작한<씨티 비엘라(2005)>, <여행가방 칸타타(2005)>등은 모두, 실천하며 행동하고 경험하며 기억함으로써 분명히 존재하는 타자들의 언어가, 중심의 언어질서 내에서는 번번히 그 존재를 거절당한다는 것에서 착안한다. 조은지는 이렇게 의미화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번역되지 않는 언어들로 중심의 언어들을 공략하거나 힘겨운 의미화 작업을 시도하기 보다는, ‘소리’나 ‘노래’, 혹은 시각적인 ‘시’등으로 남을 수 있도록 물질화 하는 작업으로 응수한다. 그리고 이것은 타자들 언어의 존재를 증명하는 중요한 물질적 증거로 되돌려 진다. (비헬라 벨라, 2005/ 진흙시, 2006/ 엑소더스-행동하는 시, 2007)
한 편, 2005년 이탈리아의 ‘씨따델라르떼(Cittadellarte-Fondazione Pistoletto) 예술가 거주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제작한 짧은 비디오 작업인
“… 남자친구 없으면 자가용도 없다. // Oh my darling, 나만 보고 웃어주세요./ No boyfriend no car,// 오늘은 그를 구찌 매장으로 데려갈까 생각한다. 그 보다는 우아한/ 샤넬로 갈까. 아무래도 블랙 앤드 화이트의 클래식이 좋겠지./ 내가 좀더 우아해 보인다면 재현씨는 나를 더욱 사랑하겠지./ 그가 그날 피곤해 보였던 건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아주 바쁜 비지 비지 비즈니스 맨이니까.//… 오 나의 재현씨, 날 떠나지 마요./ No boyfriend no car// 길에서 담배 피는 후진 취향의 저 여자를 빨리 지나쳐 버려야지./ …품위 있는 남자에겐 그만한/ 품위를 지켜줄 여자가 필요하다./ 재현씨는 나만 보게 될 것이다.// No boyfriend no car…“
영 상 안에서 조은지는 직접 “길에서 담배 피는 후진 취향의 저 여자”를 연기한다. 여자는 ‘PACE(평화)’라는 구호를 들고 길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탈리아인 남자의 자가용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이스라엘인 여자는 달콤한 드라이브를 즐기며 자본주의 내에서 가장 성취되기 쉬운 여성욕망을 한껏 즐기는 중이다. 글로벌 경제체제 내에서 자본의 배치를 이해하는 이 두 여자의 방식은 그것에 철저히 공모하거나, 저항하거나 하는 식으로 이분화되지만, 실상 이 순간 두 여자의 무기력함은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과장된 사랑의 행위를 전시하는 한 여자와 작동하지 않는 정치적 올바름을 전시하는 다른 한 여자는 ‘자가용’의 내부와 외부에서 엇갈리는 동시에 교차되고, 관객들이 느린 레게풍의 밥말리를 기억해내며 아련한 (그렇지만 뭔가 이상한) 노래 소리에 빠져들 때쯤, 길가의 여자가 차로 다가와 한국어로 담배를 요구한다. 그러자 이들은 각자 자신의 ‘모국어’로 떠들어대고, 산뜻한 백인 배우들의 로맨스를 재현하던 화면은 난데없는 언어혼란과 소음으로 떠들썩한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된장녀’의 위선적 취향과 활동가의 무기력한 구호를 먼 발치에서 관망하던 카메라가 돌연 태도를 바꾸고, 모든 문제들과 혼란이 충돌하는 공간으로 가까이 이동하여 ‘자신의 언어’를 주장하는 ‘말하는 주체’로서의 개인들에게 파고든다.
이 처럼 조은지의 작업에서 만나게 되는 언어들은, 단지 이 독특한 예술가의 예술가적 위상Authority을 관철시키기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니다. 그녀의 예술적 실천은 ‘구성적 외부’로만 존재하는 수많은 타자들이, 자신의 언어를 구사하는 주체로서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세계의 견고한 구조를 살짝 비틀어 내는 일이다. 조은지는 의미의 언어와 무의미의 언어가 대응하는 팽팽한 경합의 공간에 멋적은 웃음을 띄고 슬그머니 개입한다. 한없이 엄중하고 진지한 절대언어, 혹은 예술언어의 공간에 ‘잡음’과도 같은 매체간의 혼용, ‘농담’처럼 숙련되지 않은 미숙한 언어들의 난립, 절대적이고 통상적인 소통의 방식을 외면하는 ‘뻔뻔함’으로 무장한 채이니 한참 멋적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토록 가볍고 유쾌한 조은지의 예술언어의 개입으로 절대적 언어의 권위들은 서서히 낙후된다. 유머와 취약함의 정치가 엄격하고 견고한 보편언어의 질서를 교란하는 짜릿한 순간이다.
<여행가방 칸타타>, 퍼포먼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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