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02

[이대대학원신문]양혜규-어떤 균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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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_ 어떤 균열내기 (이대대학원신문53호)

지금 인천이라는 도시의 후미진 구석, 한 버려진 작은 민가에서 작가 양혜규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현재 국내외의 미술계에서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가장 활발하게 작업하고 있는 작가 중 하나라 꼽을 수 있는 유명작가의 개인전이 열리는 장소라 예측하기엔 찾아가는 길도 번거롭기 짝이 없을 뿐더러 참으로 초라하고 난감한 장소다. 더욱이, 그곳을 채우고 있는-일반적인 혹은 미술에 대한 기대를 배반할뿐더러, 전혀 친절하지 않은-모호한 설치물들 사이에서라면, 쉽지 않은 걸음을 떼 어렵게 찾아온 관객들은 어쩌면 조금은 당혹스러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한 요소들이 작가가 그의 작업 전반을 통해 견지해온 일종의 정치적인 수사라면 어떨까? 자신의 고향을 가지지 못한 아시아의 어느 작은 국가 출신의 왜소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유색인종 여자가, 문화 권력의 중심인 유럽 미술계를 떠돌면서, 전지구화와, 시스템과, 제도와, 규율 된 주체들과, 권위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훈육한 모더니티라는 거대 기획에 끈질기게 균열을 내고 발언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음모를 짜고 있는 중이라면?

작가 양혜규의 작업은 거의 대부분 근대화라는 거대기획 내에서, 또한 사회/경제/정치적인 구획 내에서 견고하게 유지되어온 질서들에 저항한다. 이 저항은 때로는 아주 사사로운 발견에서 시작되기도 하고, 매우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은유 되기도 하며, 약간의 딴지 걸기로 재 맥락화 되거나, 일종의 유머러스한 개입으로 전략화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국의 제도교육 내에서 훈육된 학생들의 교과서를 헌책방을 돌며 수집하고, 거기에 그어진 밑줄, 필기, 동그라미, 중요표시 등을 제외한 본래의 텍스트를 모두 지워냄으로써, 작가 자신의 일상적 경험과 그곳에서 이루어진 작은 발견을 재 맥락화하는 방식으로 제도적 허상을 조롱하고 그 진위여부를 모호하게 만들거나(무명 학생-작가들의 흔적 Trace of anonymous pupil authors, 2001),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들이 거대한 시멘트 언덕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읽고 쓰고 뜨개질 하도록 유도하는 세 개의 노동 정거장을 만듦으로써 포드주의로 균질화된 참노동의 경계를 와해시키고, 전지구화 경제내의 착취적인 노동의 형태와 경직성에 대해 일종의 아우또노미스트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식이다(비타 악티바-자유롭게 종사하기 Vita Activa, 2003).

양혜규는 1세계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3세계 출신의 여성 작가들이 주로 자신의 생존과 1세계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이용하기 쉬운 젠더적/인종적/민족적 소수성, 혹은 그 희귀성 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그들 자신의 입을 통해 발화되어야 할 정치적인 이슈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의 조형언어가 가진 일종의 난해함과 불친절함은 어쩌면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게 하는 예민한 촉수들을 작동시키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촉수들은 그가 바라보는 세계의 무수하고 섬세한 차이의 결들 또한 감지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여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그 유명한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양혜규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과 경험된 상황들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않는 한 여성 주체의 냉철하고 예리하지만 유연한 성찰을 거듭해 왔다. 지금 인천 사동의 한 폐가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작업들은, 잔혹한 근대성의 폭력적인 균질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요히 자신의 독자적인 공간을 살아온 한 장소에 대한 이 성찰적인 홈리스의 사려 깊은 시선이 담겨 있다.

*작가 양혜규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후 독일로 떠나 프랑크푸르트 조형예술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국경을 가로지르며 미술작업과 글쓰기를 넘나드는 유목적문화 생산활동을 하고 있다. (작가 양혜규의 홈페이지 http://www.heikejung.de/)

*인천 사동의 한 폐가에서 열리고 있는 양혜규의 개인전 <사동30번지>는 10월 8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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