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랜
2004-07-22 15:54
초 현실주의 예술가, 배우, 작가, 시인, 문학평론가, 번역가, 정치 활동가, 나치정권에 반대하는 레지스탕스 등의 타이틀은 클로드 카훈(1894-1954)의 활동범위를 짐작케 하는 화려한 이력이다. 1894년 프랑스의 도시 낭뜨(Nantes)의 영향력있는 유태계 출판인 가문에서 루시 슈봅(Lucy Schwob)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녀는, 클로드 카훈이라는 작가명으로 스스로를 정체화 했다. 그녀는 근래에 이루어진 여성작가와 성적 정체성에 대한 연구의 성과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지만, 사실상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미술지식을 위한 통로를 통해 클로드 카훈이라는 이름을 찾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다.
1971년 페미니스트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은 “왜 위대한 여성미술가들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남성들에게 전유되었던 미술사 교본위에 ‘위대한’ 여성미술가들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는 기존의 역사적 체계와 작가의 위대성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정확히 십 년이 지난 1981년에 <여성, 미술, 이데올로기(Old Mistresses: Women, Art and Ideology)>라는 논문을 통해, 로지카 파커와 그리젤다 폴록은, 미술사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파악하고 여성을 제외시킨 미술사의 구조적 모순을 분석했다. 이것은 여성과 미술,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역사적인 관계를 파고들면서 기존의 미술사 방법론을 해체하였고, 여성미술을 연구할 새로운 이론적 틀을 마련하는 성과를 낳게 된다.
이렇듯, 70년대의 1세대 페미니즘 미술비평을 시작으로 그에 대한 반론과, 수정. 보충으로 이어지는 2,3세대 페미니즘 미술비평은 90년대에 들면서 성차별적인 의미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체제 자체를 교란하는 것을 넘어, 소위 포스트모던이라는 시대적인 기류속의 다채로운 페미니즘 문화 이론들과 연계해 여성의 정체성(Identity), 주체성(Subjectivity), 그리고 섹슈얼리티(Sexuality)라는 문제들에 천착하고 있다.
클로드 카훈의 작업들은 그녀의 진보적이고 탁월하며, 또한 다채로운 이력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의 수 십 년에 걸친 지난한 연구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우리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작업들은, 기존의 의미체계를 가지고서는 소위 ‘여성성’이라던가, 혹은 보다 구체적으로 ‘여성작가의 생산물’이라는 편의적인 단어로 분류해 내기에 당혹스러움을 남기기 때문일 것인데, 아래의 두 자화상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2)
(그림1)
(그림2)
이 두 자화상을 마주하고 피식 웃어버린(혹은 뜨끔한!) 당신들, 당신들에게 이 글을 바치노니, 지겨워도 마저 읽어라.-_-;;
카 훈에게, 그녀의 성 정체성은 일련의 작업들을 생산해내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과 욕망을 드러낸다. 여성의 몸이 재현되는 전통적인 목표가 생물학적인 여성성, 모성, 그리고 에로틱함 등을 드러내는 것 이였다고 한다면, 그러한 기대를 향해 반격하는 이 작품 속의 남성성, 혹은 이 신체를 치장하는 남성의 가면은 무엇인가?
자 화상(self-portrait)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다른’ 주체들로 이행하는 그녀의 몸은 어떠한 완결된 몸, 혹은 정의된 몸이 아니라, 성별과 주체의 경계를 흐리며 탈주하는 몸, 혹은, (버틀러 식으로 말하자면)이상화된(혹은 허구인) 남성성을 패로디하는 ‘드래깅(dragging)’ 하고 있는 ‘수행적 젠더 (perfomative gender)’이다. 사회적으로 성별화된(gendered) 신체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며, 때문에, 재현된 그녀는 성별의 구분이 불가능한 ‘모호함’으로 보여진다. 샤론 개인져(Sharon Ganzer)는 카훈의 28년작 자화상(그림3)을 들어 그녀의 ‘성적 모호성(sexual Ambiguity)’에 대해 이렇게 질문한다.
(그림3) 'Self-portrait', 1928
“… 성적 모호성을 연기하는 것의 한 예는 1928년작인 카훈의 자화상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카메라 앞에 있다. 금빛으로 부분 염색되고, 짧게 잘린 그녀의 머리-,그녀의 손은 옷의 칼라를 붙들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단호히 관람자를 향하고, 자신에 대한 이중적인 표상(double image)이 거울에 가득 반영된다. 카훈의 일련의 사진 작업들속의 많은 이미지들처럼 이 자화상 역시 강렬하고 또한 모순적이다. 그녀의 표현은 격렬하지만, 날카로우나 격리된 그녀의 시선을 조종한다. 이 공격적인 이미지들은 유혹적이고 신비스럽다-누가 이 여성인가?
누가 이 “여성”인가? 그녀의 작품들에서 성별간의 차이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짓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 들은 습관적으로 성별을 붙이는 작업을 하려고 들기 때문에, 이는 곧장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의심을 불러낸다. 그들의 인식체계에 존재하지 않는 어떠한 ‘비정상성’들 때문에 불편함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혼란을 잠재우려 해보지만, 그녀의 삶의 가장 큰 부분 이였던, 이복 여동생이자 영혼을 나눈 동반자, 수잔 말허브Suzanne Malherbe와의 평생에 걸친 사랑이라는 전력은 또한 그녀의 ‘비정상성’을 확인 사살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그녀의 삶과 예술, 그리고 이미지 속의 그녀는 그 자체로는 모반과 위반이라는 균질적인 행보를 보이지만, ‘강제적 이성애’와 ‘근친상간 금지법’으로 훈육된 이 사회적 맥락위에서 그것은 너무나 비 균질적인 것으로 타자화 되어 버린다. 이러한 과정은 레즈비언 주체가 늘 거절당해온 이성애중심 사회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위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이중 이미지(double image)는 이미 예상된 우리의 이 당연한 혼란에 대한 그녀의 대답일지도 모른다. 하나가 아닌 주체들. 두개의, 혹은 셀수 없는 다른 그/녀들이, 혹은 그/녀의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 가면아래, 또다른 가면. 나는 이 모든 얼굴들을 지워내는 것을 결코 끝내지 않을 것이다.("Sous ce masque un visage. Je n'en finirai pas de soulever tous ces visages")”
(그림4)self-portrait, “don’t kiss me, I’m training”1927
(그림5)Self portrait (kneeling with mask) 1928
(그림6)Self- portrait 1920
(그림7)self-portrait, 1929
*참고문헌
-Honor Lasalle and Abigail Solomon-Godeau, Surrealist Confession: Claude Cahun’s Photomontages, After image vol.19, 1992
-Abigail Solomon-Godeau, The Equivocal “I”: Claude Cahun as Lesbian Subject in Inverted Subject, Edt.by Shelly Rice, 1999
-Rosalind Krauss, Claude Cahun and Dora Marr: By Way of Introduction, Bachalors, 1999
*관련 웹 페이지
http://vinland.org/scamp/Cahun/
http://wolganmisool.com/199904/international_03.htm
http://www.artwrite.cofa.unsw.edu.au/0123/briefs/Ganzer_Cahun/ganzer_cahun.html
http://myweb.lsbu.ac.uk/~stafflag/claudecahun.html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