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02

푸딘댕2

20060127/ 푸딘댕

아침 7시전에 일어나는것에 연이어 성공하고 있다. 아침을 여유롭게 맞이하는 것이 제법 괜찮다. 이런 생활습관이 서울에서도 지속될 수 있을까? 서울의 아침도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을까? 혹은 이 평화는 과연 평화 일까? 일상이 제도나 시스템, 주의주장과 충돌해도 이 한줌의 평화만으로 과연 만족할 수 있는것일까? 꽤 느슨해 지긴 했으나 사라지지 않는 이 긴장감은 계속 필요한 것일까, 혹은 그렇지 않을까. 잔혹하며 고통스럽고, 심지어 이제는 지겹도록 지난한 이나라의 사상적, 이념적 갈등, 그리고 삶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세계와 삼세계사이의 끝이 보이지 않는 계급투쟁은 어느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일까? 평화로운 아침, 평화로운 길을 걸으며 갑갑한 생각에 사로잡히다.




내 생에 가장 많은 초록색을 관찰한 날이다. 수많은 초록들에 둘러쌓여 있자하니 저절로 이 빛깔들에 주목하게 된다. 정돈되지 않은 나무와 풀 그리고 그 동류의 것들이 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 현실이 현실같지 않고 삶이 삶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만드는 이 초록의 최면.


점 식식사를 마치고 이 오가닉 팜의 주인이자 현재 푸딘댕 마을에서 진행중인 모든 프로젝트의 중심에 서계신 타농시씨와의 간담회를 마련했다. 우리들은 그를 Mr.T라고 부르거나, '퍼(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는 라오스의 몇안되는 엘리트 교육의 혜택을 받은 이로서 삼림부의 관료로, 그리고 식물학자로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고향으로 귀농하여 뽕나무 농장을 열고 농부로 살아가고 있다. 아저씨와의 간담회 내용은 글로벌 학교의 스텝 키가 정리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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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는 이 농장을 1996년 뽕나무 잎을 기르면서 처음 시작했다. 실크생산은 라오스의 고유한 문화다. 이런 문화를 보존하는 노력의 일환. 더불어 많은 마을 사람들이 나의 생각과 계획을 이해하면서 함께 마을에서 ‘작업’들을 벌여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동기가 있었다. 알다시피 이 농장은 유기농만을 취급하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농장을 방문할 때 마다 나에게 묻는다. 이런 붉은 색의 척박한 땅에서 왜 그렇게 유기농을 고집하느냐고. 그러나 나는 유기농 농장을 운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 것은 이윤 창출의 목적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함께 공존하면서 지속 가능하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을 ‘함으로서 배우는’ 과정인 것이다.

내가 이 농장을 일구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두개의 주제가 바로 개발과 발전이기도 한데 알다시피 이 것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 푸딘댕에는 세 부족이 모여 살고 있고 필요한 것이 신생 직업 창출, 교육 그리고 의사소통 등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해 온 것이고 또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일들을 하면서 가진 나의 큰 바람은 부족, 성별, 재산에 관계없이 누구나 양질의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한 일들이 푸딘댕 근처 7개의 학교를 짓는 것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자전거를 구입해서 마을에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제공해서 멀리 있는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또 2003년부터 농장 카페에서 시작한 아이들을 위한 영어수업을 시작해 마을 아이들의 영어 사용력이 많이 올라갔다. 이제는 좀 더 섬세하게 기획을 하면서 영어수업을 만들어 갈 것이다.

10 년간 농장 운영을 했지만 집중적인 활동이 전개 된지는 5년 정도다. 그 이유는 2000년 이후부터 왕위엥 시에서 관광산업의 문을 크게 열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이 많이 들어 오게 되었고 자연스레 라오스에 최초인 유기농 농장을 운영하면서 비교적 많은 수의 게스트 하우스를 가지고 있고,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카페가 있는 푸딘댕 Organic Farm을 찾아왔다. 관광객 수가 늘어나면서 각종 매체에 조금씩 이 마을 소개와 함께 티 아저씨의 활동 내용이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마침 2003년에 아반코리아 측 사람들이 이 푸딘댕에 왔고 스쿨버스 운영, 장기자원활동가 파견(인력제공), 흙으로 마을회관과 유스센터 그리고 도서관 등을 짓게 되었다. 이런 국제적 상호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과정에 우리 하자글로벌학교 팀이 합류한 것이다.

질문1) 10년간 농장 운영을 하면서 시행착오는 없었나?

시 행착오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내가 즐거웠고 신나게 일을 해나갔기에 시행착오라는 말을 쓰지는 않는다. 내가 여기서 이런 일들을 벌이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내 고향이 바로 이 곳 왕위엥이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불어 닥친 국가의 무자비한 관광산업 흐름들이 급속하게 이 곳 마을의 문화와 자연을 파괴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왕위엥 시 안에 있는 푸딘댕에서 기반을 마련하고 이 곳 마을사람들이 외부 낯선 이들과 지혜로운 관계를 맺어갈 수 있도록, 자연을 보존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면서 몸서 실천해 나가는 활동을 하고자 했다. 이런 과정들이 아직까지도 정말 즐겁고 재밌다.

질문2) 왜 이리 많은 양자녀를 거느리고 있나?

한 국과 마찬가지로 라오스에서도 가슴 아픈 전쟁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 항상 어려운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은 어린이와 여자다. 나는 인류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히 입양을 했던 것이다. 어느날 시내 길거리를 가다가 3개월이 된 어린아이가 버려져 잇는 것을 보고 입양을 하게 되었고, 전쟁 후 많은 수의 고아들을 키울 능력이 없는 정부가 관리하고 있던 아이들을 여유가 될 때마다 3명씩 2명씩 입양해서 키우기도 했다. 또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한 아이들에게 단순히 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 딸 같이 농장에서 살면서 일하기도 하고 나의 일을 돕기도 하면서 학교를 다니게 된 아이들도 있다(참고로, 티 아저씨의 양자녀들은 대부분이 청소년으로 보이는 여자이거나 어린이들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참 행운아다. 어린시절 어렵지 않은 가정환경 덕분에 배고픔을 절실히 느끼지 않았고 비교적 높은 교육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더불어 생활력도 길렀다. 나는 남들 보다 좀 더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히 기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질문3) 자식들이 많은데 은퇴 후에 유산 관련부분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지 금은 열매를 기르기 위해 물과 거름을 주는 시기이지 유산이라는 열매를 딸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은퇴를 하면 농장과 사유재산은 나중에 유스센터가 지어지고 리더로 활동하게 될 마을 청년들이 재단(Foundation) 개념으로 운영하는 계획을 생각하고 있다. 이런 운영을 하면서 마을에 필요한 교육, 환경 등의 활동 등을 지속 가능하게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질문4) 유기농 농장인 이 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뽕잎 재배인데 어떻게 하나?

간 단하게 요약하겠다. 거름은 화학비료가 아닌 농장에서 나오는 음식쓰레기(대부분이 채소류, 곡류), 동물의 배설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부족한 영양분이 있어 왕위엥 산 주변에 아주 많이 있는 동굴 속 박쥐 배설물을 구입해서 거름으로 쓴다. 예상하다시피 가장 중요하면서 고민스럽기도 한 것이 바로 회충 퇴치다. 이 것을 친환경적으로 접근해서 도마뱀, 개구리 등을 농장에 많이 풀어 놓았다. 이런 동물들이 해충을 잡아먹는 효과가 있는 동시에 점점 사리지고 있는 동물류 이기 때문에 보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해치우는 해충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 농장에서 기르고 있는 레몬그라스 등의 허브식물들을 빻아서 물을 섞어 해충이 있는 장소에 뿌린다. 그래도 코끼리 풀과 같은 잡초는 정말 골치가 아픈데 이럴 때는 화학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을 농부들을 참여 시키는 방안으로 간다.

질문5) 자신을 생물학자라고 이야기 했는데 농장에 오기 전에 어떤 일을 했나?

우 리나라 치면 산림부에서 국장직을 20년 가까이 했다. 주로 환경보호와 개발이 중심 업무 주제였다.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명예와 부를 누리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삶 보다는 헌신과 기여를 할 수 있고 위에서 내려오는 방식(Top down)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뭔가를 이루어 내면서 개개인의 목소리들이 모여서 시스템을 변화시키기도 하는 방식(Bottom up)의 활동을 하고 싶어서 관직을 그만 두었다. 그 후 국제 환경관련 NGO에서 5년간 일을 하면서 이 곳 푸딘댕으로 올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참고- 아저씨는 프랑스가 라오스를 식민통치 할 때 French catholic 중학교를 다녔고 약 8년간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불가리아에서 유학했다. 대학 때 생물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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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격적으로 우리가 해야하는 일들의 윤곽이 잡혔다. 일단은 오전시간엔 도서관의 창을 닦고 커튼을 만든다. 이것은 현재 이 마을 학생들애게 가장 중요하고도 진지한 작업인 into the village 라는 활동의 최종 결과물인 전시를 위해 도서관안의 인테리어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멤버들도 이 활동에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이 활동은 주로 아침이나 낮시간을 이용하여 마을 아이들의 스케줄에 맞춘다. 저녁엔 영어수업에 참여하게 된다. 이를 위해 오후 나절의 자유시간은 영어 수업 준비 시간으로 반납하게 된다. 이번주는 학생들이 중간고사가 끝나고 잠시간의 방학이라고 하는데, 다음주가 되면 아침식사전에 스쿨버스를 타는일도 하게 될 것이다. 스쿨버스 역시 이 곳 푸딘댕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중의 하나이다. 이제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가 촘촘히 돌아간다. 낯선 일상의 싸이클에 몸이 적응해 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이곳에도 일상은 있다. 내일도 모레도. 또 그 다음날에도 지속될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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